진보의 각성을 질타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자의 외침

[화제의 책] 박동천의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누군가에게 박동천의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펴냄)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았을 때 몇 가지 점에서 망설여졌다. 무엇보다도 연구자로서 나는 서평이라는 작업의 사회적 생산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다. 지인이거나 원로 교수의 글에 대한 서평은 비평이라기보다는 대개 낯간지러운 칭송이 대부분이다. 권위와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의 학계 풍토에서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유보 없는 비판은 경솔하고 오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지식인 사이의 폐쇄적 비평 문화가 해체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대중이 직접 판단하고 표현하는 지식 정보화 시대에 영화든 문학이든 직업 평론가의 사회적 영향력과 기능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가 가능한 현 상황에서 전공 서적이 아닌 대중 교양서의 가치 판별은 일반 독자층의 몫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심한 부담감을 주었던,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박동천의 책에 대한 서평을 수락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이번 서평을 통해 지난 2년간 <프레시안>을 통해 열정적으로 통렬한 칼럼을 써온 한 지식인의 철학과 사회 인식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서고 싶었다.

 

박동천의 이번 책(<특강>)에 대해서는 이미 두 편의 서평이 개제된 바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도록 하겠다. 우선, <특강>의 분명한 장점은 자유주의에 대한 필자의 확고한 신념 안에 있다. 최장집의 지적대로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에 의해 오염되었고, 진보에 의해 버림" 받아왔다. 글의 마지막 문장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의 결합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책임감 있는 한도 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진보적 이상의 최대치"라는 결론은 독자의 동의 여부를 떠나 필자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정치적 지향이다.

 

나는 자유주의를 통한 진보의 재구성을 주창하고 있는 <특강>은 이전의 그 어느 것보다 솔직하며, 체계적인 성과라고 평가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의 결합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개혁 세력과 중도 정당의 이념적 토대를 강건하게 해 줄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자유-노동 연합과 같은 진보 정치가 발전할 기반을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특강>의 일차적 공격 지점은 보수가 아닌 한국의 진보 세력이다. 송병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주관적 독해이거나 필자에 대한 과도한 예의의 표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보 세력의 독단론적 담론이나 관점과, 보수 세력의 그것을 똑같은 정도로 비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보수 세력의 허구적 담론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준엄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바, 여기에서도 '진보'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애정이 확인된다 할 것이다."

 

필자 자신이 명백히 이글의 대상이 진보 세력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 대목을 보자.

 

"얼핏 보면 내가 지금 양비론을 펼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 나는 지금 알맹이 없는 단순한 기세 싸움을 정치로 착각하는 우리 사회의 전통을 깰 수 있는 역할을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374쪽)

 

그는 보수파에게는 여러 차례 지적을 하였지만 듣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진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의 핵심에 해당하는 네 가지 프레임 역시 보수보다는 진보 세력을 염두에 둔 질타와 비판이다. <특강>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근본 프레임으로써 가짜 문제(지역주의)와 고정관념(합리주의, 선험주의, 민족주의)을 지목하고 있다. <특강>은 노무현 정부나 진보진영이 이러한 잘못된 프레임에 빠져 담론 투쟁에 패배하였고 진보의 의제를 상실하였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노동의 문제를 간과하였다는 송병헌의 비판이나 제도적 대안이 구체적이지 않고 합의제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하지 않아 아쉽다는 최태욱의 지적은 절반만 정당하다. 이 글에서 가장 주목받고 논쟁적이어야 할 부분은 처방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 세력이 네 가지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특강>의 진단이 적확한가의 여부에 모아져야 한다.

 

사실 <특강>의 네 가지 프레임 자체 모두가 아주 새로운 시도이거나 참신한 주장은 아니다. 지역주의를 제1의 정치 균열로 간주하고 이의 극복에 전력을 경주하는 담론과 시도는 오히려 문제를 지역화시킴으로써 연대보다는 분열을 가져온다는 <특강>의 설명은 최장집의 오래된 주장이며, 박상훈의 최근 저서에서 경험적으로 잘 분석되어 있다. 민족주의가 경직된 이분법과 집단 생존의 논리, 경쟁과 개방에 대한 제노포비아, 과거에 대한 집착 등을 낳고 있다는 지적 또한 낯익다. 한 연구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좌우를 불문하고 '민족주의로부터의 탈주' 시대에 살고 있다.

 

<특강>의 일차적 덕목은 합리주의와 선험주의와 같은 난해한 철학적 사유들을 풍부하고 쉬운 사례들을 통해 한국의 정치 현실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에서 정당 논의는 미국식 선거 전문가 정당 모델과 유럽식 대중정당 모델을 둘러싸고 이분법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각자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모델의 강변, <특강>의 표현에 따르면 과학적·평면적·산술적 합리성을 둘러싼 주장만 있어왔지 내부 현안을 결정하는 제도적 절차의 확립과 같은 실제 쟁점에 대한 합의와 협상, 곧 입체적·정치적 합리성은 배제되어 왔다. 그 결과 추상적 원칙만 고집하는 단일 안건 정치, 지사 흉내, 열사 숭배가 범람하게 됐다. 또한 진리나 선에 대한 우선적, 독점적 인식을 전제한 선험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교조주의와 원칙주의를 낳아 진보 진영 내부를 이념적으로 분열시키고 감정적으로 대립시켰는지를 최근의 다양한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특강>의 네 가지 프레임은 새로운 것이든 익숙한 것이든 진보 진영이 당면한 담론의 위기와 문화 지체 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중립주의의 가면을 쓰고 쟁점을 돌려 말하며 대안보다는 비판에 열을 올리는 진보 지식인들의 무별주의에 대한 <특강>의 비판은 매우 통렬하다.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교착 국면에서의 갈등 해결을 위한 제안들, 이를테면 결선투표제와 연합 정치 성사를 위한 제비뽑기 경선 등은 당장 적극 검토할만하다.

 

<특강>은 내겐 두 가지 점에서 불만이다. 첫째는 최태욱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하였듯이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며 불완전하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론들은 <특강>이 아니라도 넘쳐난다. 여기저기에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있을 뿐이지, 그것의 철학적·제도적 원리나 실제 체제(regime)로서의 작동 과정, 사회민주주의와의 차별성, 한국에서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은 <특강>이 사회적 자유주의를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념적·정치적 좌표로 선언한 거의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특히 아쉽다. 그간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국내 연구는 자유주의나 사민주의를 다룬 사상 개론서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2005년에 조희연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한국의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이제 공공성 강화를 기치로 사회적 자유주의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 또한 체계적 담론이었다기보다는 실천적 지식인의 절실한 충고에 가까웠다. 앞으로 <특강>에서 제시된 바 있는 사회적 자유주의가 박동천의 후속 연구를 통해 보다 구체적 형태로 발전하고, 이의 적실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길 기대한다.

 

또 하나의 불만은 <특강>의 결론이자 제도적 대안으로 제시된 6부의 사법 제도 개혁이 전체 구성과 부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사자주의(배심원제)로의 제도 개혁을 주장한 필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행 직권주의에서 당사자주의로의 근본적인 제도 개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검찰 개혁의 출발이며, 일반 시민들의 참여와 공공성 인식의 제고를 가져오며, 무엇보다도 절차에 따른 공정한 해결의 유용한 사례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시급하고 중요한 대안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특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네 가지 프레임을 극복하는 데 얼마큼 유용하며, 사회적 자유주의의 발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같이 둔감한 독자들은 <특강>을 읽고도 진단(네 가지 프레임)과 처방(사법 제도 개혁)이 제 각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인적으로 박동천의 사법 개혁 방안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대안 제시는 그 자신이 강조한 바 있는 시의성과 합리주의, 선험주의의 틀에 스스로를 가둘 우려마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법 제도를 당사자주의(영미식)와 직권주의(대륙식/한국)로 대별하고, 핵심적인 발상의 전환을 위해 당사자주의를 전면 도입하자는 주장은 분명 진전된 의견이나 사법 제도 전반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또한 당사자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이 유럽의 직권주의 국가들에 비해 사회적 갈등의 해결 능력이 높고, 시민들의 공적 참여가 활성화되어 있으며, 일상의 분쟁과 다툼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경험적 자료와 인과 관계는 <특강> 어디에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특강>이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어떤 완전하고 합리적인 모델이나 선진국가의 이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바탕을 둔 정당과 지식인들의 냉철한 인식, 공정한 담론 경쟁과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통해 구축되는 과정과 절차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후의 어록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경구였다. 고인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던 최장집의 최근 저서는 사회적 시민권이 정당과 결합할 것을 주문하는 <민중에서 시민으로>(돌베개 펴냄)이다. <특강>은 진보 진영에 대한 각성과 시민의 성찰을 촉구하면서 제도와의 변증법적 선순환을 강조하고 있다. <특강>이 사회적 자유주의의 교본으로 발전하여 생전의 대립을 사후의 화해로 멋지게 승화시킬 정치적 교량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상호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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