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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구마 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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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구마 겐고: 나의 매일은 숨가쁜 세계 일주, 구마 겐고, 안그라픽스


우리나라에 세월호 사건이 있다면 일본에는 3.11 대지진(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이 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3.11 대지진 이후의 인류 문명과 건축의 대전환을 묻고 모색하며, 자신의 35년 건축 인생을 돌아본 책이 나왔다. 그의 생각을 음미하는 것은 세월호 이후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클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꾼 것은 대재해라고 저자는 말한다. 1755년 11월 1일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리스본 대지진으로 5-6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세계 인구가 7억 명 정도일 때의 이 참사로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버린 것이라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절망으로부터 근대과학과 계몽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류를 지키기 위한 ‘대재해 시스템’의 다른 이름이 ‘문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문명의 중추를 담당해 온 것이 건축이다. 리스본 대지진의 공포에서 근대건축과 근대도시계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1923년의 간토대지진이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나무로 지은 집이 가득했던 도쿄는 불바다가 되었고 1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을 쫓아 목조를 버리고 콘크리트와 철을 사용하는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과 도시를 만들었다. 이런 도시에 필요한 원자력발전소도 계속 늘려갔다.
 
그런데 마침내 2011년 3.11 대지진이 왔다. 현재까지 사망자 15884명, 부상자 6148명, 실종자 2633명으로 집계된 대참사다. 방조제와 콘크리트 매립, 호안(護岸) 등 콘크리트 건축은 3.11 대지진과 방사능 앞에 완전히 무기력했다. 강한 건축이라는 근대 건축의 무력함과 20세기 공업사회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저자는 20세기의 세계 문화와 경제를 규정한 것은 유럽적인 것이 미국적인 것에 패배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전쟁이 끝나면 어디나 주택난이 시작되는 데 1차 세계 대전 후에 유럽과 미국은 정반대의 정책을 취했다. 왕족이나 귀족 외에는 집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는 통념이 강했던 유럽에서는 임대료가 싼 공영주택을 대거 공급했다. 반면에 미국은 도시 밖 녹지를 활용해서 집을 짓고 주택담보대출을 기반으로 집을 소유하는 정책을 폈다.
 
‘푸른 잔디를 깐 교외의 하얀 집을 가진 행복한 핵가족’과 ‘도시와 교외를 연결하는 교통 시스템’이라는 미국문화는 건설 산업은 물론 자동차, 석유, 전기, 금융, 제조업까지 모든 산업을 활성화했다. 이것이 미국이 20세기에 세계 패권을 차지한 배경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미국적 시스템은 담보대출이라는 거품 위에 지은 허구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이 허구를 점점 더 높이 쌓아 올리던 금융자본의 도박적 자본주의가 터진 것이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라는 것이다.
 
건축적으로 보면 미국을 만든 교외주택과 도시의 초고층 빌딩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출현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콘크리트, 철, 유리를 사용한 기능적이고 투명한 공업사회의 제복과 같은 건축이다. 전작 ‘자연스러운 건축’(안그라픽스)에서도 밝혔듯이 20세기는 콘크리트의 시대이다. 문제는 콘크리트 건축은 간단하고 편리한 가설 주택 같은 것인데 이런 가설적인 콘크리트가 건축의 표준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디서나 형틀만 만들어 집어넣으면 되는 콘크리트는 장소적 보편성 뿐 아니라 형태의 자유도 가지고 있고, 나무, 돌, 알루미늄 등 붙이는 것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장소, 기술, 건축 재료 등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겉만 화장하는 콘크리트의 단일성을 벗어나자고 말한다. 더구나 3.11 대지진은 강한 근대 건축이라는 콘크리트 건축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초고층빌딩, 도로와 고속도로, 전차와 지하철망, 쇼핑센터가 있는 도시의 존재방식은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것 같지만 미국이 20세기 초에 자동차 산업, 석유산업과 공모해 만든 하나의 특수한 모델에 불과하다고 한다. 석유에너지의 대량 소비에 근거해 만들어진 이런 도시들은 불과 1세기 정도의 단기 모델로 끝날 것이라고 저자는 예견한다.
 
도시의 존재 방식은 다양하고 풍부하다고 한다. 중국과 유럽에도 다양한 도시들이 있지만, 아랍의 도시들도 독특하다고 한다. 예컨대 이집트의 카이로는 ‘죽은 자의 거리’와 ‘산 자의 거리’가 공존한다. 아프리카 초원의 집은 사생활과 보안이라는 집의 개념을 정반대로 뒤집어 집이 공공 공간이라고 한다. 섹스 같은 것은 집 밖에서 하고, 담장이 아니라 초원이 성벽의 역할을 하며 주민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집은 ‘사적’이라는 개념이 더 나아가 ‘사유’가 되면 사람은 이것을 평생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속화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택담보대출 시스템을 발명한 미국은 내 집 마련하면 평생 안심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며 20세기 자본주의를 견인했고, 이 환상이 가장 잘 먹힌 곳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환상은 주택담보대출로 평생 회사에 매인 샐러리맨과 집에 갇힌 전업주부를 양산했다. 저자의 건축 개념의 시작은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지내는 어머니였다고 한다.
 
저자는 샐러리맨주의를 비판한다. 내 집을 짊어진 샐러리맨에게 대출상환계획이 뒤틀린다는 것은 인생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내게 위험할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샐러리맨주의다. 이런 관행은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의 활력 없는 관료사회를 만들고, 건축에서는 예술성과 창조성을 빼앗아 결국 매력 없는 도시가 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아메리칸 드림, 콘크리트, 샐러리맨주의까지 20세기를 규정하는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한 것이 그의 건축 인생이었다. 그는 원래 획일적인 콘크리트 건축을 벗어나 자연과 장소와 현지의 건축 재료를 결합한 자연스런 건축을 지향하는 건축가로 알려져 왔다.
 
그는 3.11 대지진이 일본사회의 변곡점이 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생각과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자연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건축이다. 깨끗하고 변하지 않고 번쩍이는 건물이 아니라 변색하고 낡아가고 서서히 죽어가는 건물이다. 가는 나무 막대기를 서로 물려 조립하는 지도리의 격자라는 기법을 활용한 건축이 한 예이다. 이것은 만들고 부수는 것을 반복할 수 있는 건축인데 치과재료를 전시하는 GC프로쏘뮤지엄리서치센터를 이미 이 방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도호쿠의 장인들과 함께 현지의 재료를 사용해 공업사회를 넘어서는 아이디어가 담긴 작은 제품들을 만드는 프로젝트도 시작했다고 한다. 생활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를 철저하게 아낀다거나 하나의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해 본다와 같은 일상생활의 작은 실천 같은 것도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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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시청사

2012년의 나가오카시청사 건축도 이런 고민의 산물이라고 한다. 이전의 나가오카시청사는 20세기 공업시대 공공건축의 전형이었다. 확장의 시대에 걸맞게 넓은 대지를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가 큰 주차장과 함께 콘크리트 상자를 지었고, 마을 외곽에 시청과 함께 지어진 대형 슈퍼마켓 등은 마을 중심부의 삶을 공동화하고 파괴했다.

 저자는 마을의 역사와 자연을 연구하고 시민들과 수많은 워크숍을 하면서 어떤 공간과 장소가 필요한지 논의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가는 건축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시청은 외관이 없으면서 그 중심부에는 나카도마라는 커다란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 있는 건축이었다. 인간의 만남과 온기가 흐르는 이 공간은 기대를 훨씬 넘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세계의 건축가들이 늘 레이스에 나서야 하는 비참한 경주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1997년 스페인의 빌바오에 지은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이 성공하면서 건축이 아이콘이 되어 도시를 구한다는 야심이 국제건축공모전의 형태로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이 없으면 150명의 스텝이 있는 도쿄, 파리, 베이징의 사무소도 자신도 무너지므로 1년 내내 건축공모전에 참가하고 현장을 돌아보느라 시차가 사치로 생각될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현장을 보고 직접 만나는 것이 건축의 핵심이라는 그의 건축관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세계를 돌며 경험한 건축과 관련한 에피소드들도 흥미롭다. 중국에서는 오너와 고량주를 마시는 것부터가 건축의 시작이라고 한다. 경제의 흐름은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여 뉴욕의 금융계와 함께 언론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 그들은 건축 역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디어의 하나로 보고 세계 건축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있다.

저자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다. 부상을 당해 오른손을 잘 못쓰게 된 것에 대해서도 더 다양한 것이 들리고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제 쇠락으로 건축계의 일거리가 줄어들어도 올바른 건축을 지향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평가한다.

1991년 도쿄에서 건축한 ‘M2’가 혹평을 받고 거품경제 붕괴와 맞물리면서 도쿄에서의 일이 완전히 없어진 10년 동안도 지방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내실 있는 기간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이 기간 동안 건축물을 산 속에 감추어버린 기로잔 전망대, 바다, 인간, 건축을 조화시킨 워터/글래스, 바람과 빛을 통하게 한 돌로 만든 돌미술관 등 장소와 건축 재료와 설계를 엮는 독특한 작업들을 계속 진행한다.

책에 등장하는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저자의 건축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보면 어느 한 분야라도 성찰적으로 정통하면 그 것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3.11 대지진 이후의 새로운 건축과 사회를 지향하는 그의 노력이 세월호 이후를 모색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노력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월호 사건이 변곡점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진상 규명과 관료사회와 재난대응체계 개혁이 첫 걸음이지만 구마씨처럼 건축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가 주체가 되어 과거를 성찰하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것도 꼭 필요할 것이다. 21세기 우리사회의 명운이 달려있는 전사회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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