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치신문의 '전민용의 북카페'와 동시에 게재되는 북에세이입니다.


혀끝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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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을 선언하고 완전히 문단을 등진 백민석이 10년 만에 돌아왔다. 독자들 보다 동료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더 아우성이다. “이제 큰일이 일어날 참이다.”(문학평론가 김형중). “한국 소설에 새로운 겹이 생길 것 같다.”(소설가 권여선). 소설집 ‘혀끝의 남자’는 제목도 아리송하다. 심지어 9편의 단편 중 신작은 두 편 뿐이고 일곱 편은 기발표작을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웬 수선? 궁금하면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수록된 인도 여행기인 ‘혀끝의 남자’를 읽으며 묘한 분위기와 수식 없는 건조한 문장에 빠져 들었다. 실제로 작가가 경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흐름을 보는 것처럼 써내려간다. 비참하고 고단하고 폭력적인 삶의 현장이 배경으로 깔리기는 하지만 작가는 어떤 감정도 판단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것이 내가 보고 경험한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듯하다.    

보통의 세상이나 인생처럼 극적인 사건도 확실한 마침표도 없지만 “내가 아는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는” 백민석 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의 첫날밤에 본 구겨진 소년처럼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발작처럼 찾아올 기억들, 기억의 질병들, 병든 기억들이었다. 그것이 내가 하고픈 말이었고 해야 할 말이다.” 소설 속 이 대목이 작가가 글을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폭력의 기원’은 작가의 불우했던 철거촌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작품이다. ‘재채기’는 경제적으로 망한 사람들의 빚을 처리하는 일을 하는 남자가 상류층 화가 여자를 만나 느끼는 애틋함과 어긋남을 그리고 있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에서 작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왜 절필할 수밖에 없었는지 10년 만에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밝힌다. 그는 생물학적인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였고, 이제 그 끔찍했던 문이 닫히면서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9편의 단편 중에 ‘혀끝의 남자’와 ‘재채기’가 가장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과 ‘폭력의 기원’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 조금 관심이 갔고, 나머지 작품들은 별로였다. 당연히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것이다.

아무튼 나에게는 ‘혀끝의 남자’와 ‘재채기’ 만으로도 이 책을 읽게 된 것과 백민석이라는 개성 있는 작가를 알게 된 것에 감사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감탄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소설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 외에는 그저 ‘공무원집 아이’나 ‘남자’나 ‘여자’, 또는 직업으로 불릴 뿐이다. 이런 익명성이 소설과의 거리감도 주지만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나일 수도 내가 아는 누구일 수도 있다는 친근감도 준다. 자신을 이런저런 이름으로 바꾸어 소개하므로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유일하게 불리는 이름이 ‘철수’인데 이 철수의 등장이 요즘 주목받는 그 철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재미있고 잘 읽히는 소설도 좋지만 불편하고 재미없고 모호한 소설도 필요하다. 세상이 분명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살이가 알 수 없고 무의미하고 괴롭고 우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보고 싶은 방식으로 착각하며 보는 세상도 필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전자는 세상을 살아낼 힘을 주지만 후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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