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치신문의 '전민용의 북카페'와 동시에 게재되는 북에세이입니다.


결괴(決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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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소설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도 참혹한 방법으로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고 그 장면을 영상으로 보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결괴(決壞)는  ‘방죽이나 둑 따위가 버티다 물에 밀려 터져 한꺼번에 무너짐’을 뜻합니다. 이 소설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한 방에 붕괴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 소개됩니다. 동생 사와노 료스케는 지방도시에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회사원입니다. 형 다카시는 독신으로 도쿄에 사는 유능한 공무원입니다.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퇴직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고향집에 살고 있습니다. 화목해 보이지만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가족 간의 갈등이나 오해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출장을 갔던 료스케가 실종이 되면서 이야기는 긴박해집니다. 료스케의 토막사체가  전국 각지에서 의문의 범행성명문과 함께 발견됩니다. 죽기 전의 료스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다카시는 제수씨인 요시에의 약간의 의심이 더해지면서 갑자기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를 받게 됩니다.

살인을 부추기는 범행성명문의 영향은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무차별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스스로를 ‘악마’라고 자칭하는 범인들은 너무도 당당하게 살인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자살폭탄테러까지 일어납니다. ‘악마’인 시노하라 유지나 중학생 도모야를 반사회성 인격장애라는 개인 차원의 의학적 질병으로 정리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들의 폭력은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폭력의 원인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설가 김연수의 추천이라는 글귀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추천의 글을 찬찬히 읽어 가다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놀라운 통찰에 이른다.”라는 부분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 통찰력을 공감하고 싶어 소설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 김연수의 그 통찰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끔찍한 악에 우연히 마주친 한 가족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끔찍한 악을 낳은 크고 작은 공동체의 붕괴를 회복할 어떤 희망도 소설 속에서는 안 보입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던 다카시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머리 좋고 능력도 뛰어난 다카시 같은 사람도 한 개인으로는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런 아무런 ‘희망 없음’이라는 분명한 진단이 역설적으로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틈새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 사회는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이 아니라 버틸 대로 버티다 갑작스레 붕괴되는 ‘결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기우일까요? 과거에도 마야 문명, 로마 문명 등 수많은 역사적 문명들이 이렇게 ‘결괴’ 되었습니다. 반복되고 있는 경제 위기, 천연자원 고갈, 에너지 문제, 기후변화, 각국의 부채, 핵 위험, 테러리즘, 새로운 질병, 전쟁의 위험 등 문명적 ‘결괴’의 징후들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이런 문제들에 더해 결혼 포기, 출산 포기, 교실 붕괴, 청년 실업, 가계 부채, 비정규직 문제, 빈익빈 부익부, 노인 자살, 권력기관 선거개입 등 사회적 통합과 상식적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나와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 전체가 ‘결괴’ 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는 것부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통찰’의 시작일 것입니다. 저자의 장황한 설명이 때로 거슬릴 때도 있지만 깊이 있고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폭주에 한 번 빠져들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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