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모델의 정치조건’은 수많은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인 노동시장 개혁을 달성한 네덜란드의 개혁과정을 입체적으로 추적해봄으로써, 이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객관성과 상상력을 높여보고자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물론 네덜란드 모델이 과연 ‘성공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했을 때, 네덜란드에 사는 노동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평등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당과 정치인들이 개혁과정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의 정책결정과정 속에서는 그야말로 정치가 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정치의 본래 역할은 무엇이고 그것이 갈등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왜 우리의 정치는 이렇게도 시민들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함께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필자주(손정욱)

정경연 에세이2 네덜란드 모델의 정치조건


3장 개혁의 지속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유연안정성의 등장: 보라색 연립정권 시기(1994-1998)

 


손정욱 국회비서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1. 기민당이 빠진 보라색 연립정권의 등장

 

 

1994년 선거는 네덜란드 정치지형을 크게 바꿔놓았다. 1918년 이후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연립정부에 참여해 온 기민당이 정권형성에 실패했고 대신 사민당-민주66-자유당의 연합으로 정부가 구성됐다. 특히 전통적으로 네덜란드 정치지형의 좌우 끝에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사민당(적색)과 자유당(청색)이 연립정권에 동참함으로써 새롭게 등장한 정부는 이른바 보라색 연합(purple coalition)이라고 불렸다.

 

집권당이었던 기민당과 사민당은 1994년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게 된다. 두 정당은 32개의 의석을 상실하여 총 150석 중 7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사민당은 득표율이 31.9%에서 24%로 떨어지면서 12개의 의석을 잃었다. 이는 역대 사민당의 하락폭 중 가장 큰 것이었다. 하지만 기민당의 선거결과는 이보다 훨씬 참혹했다. 35.3%에서 22.2%로 하락하여 무려 20개의 의석을 잃게 된 것이다. 반면 민주66과 자유당의 지지율은 급격히 상승했다. 민주66은 7.9%에서 15.5%로, 자유당은 14.6%에서 20%로 상승하면서 각각 12석과 9석을 추가로 확보했다.

 

최종적으로 사민당, 기민당, 자유당이 각각 37석, 34석, 31석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어느 두 정당의 연합으로도 연립정권 구성이 가능한 정족수(75석)를 채울 수 없었다. 결국 24석을 확보한 민주66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민주66은 선거에서 패배한 기민당-사민당 연립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기민당-자유당-민주66의 연합도 불가능하였다. 대신 민주66의 당수인 판 밀로(Hans van Mierlo)는 기민당을 제외한 연립정권을 사민당과 자유당에 제안했고 이에 두 정당이 응하면서 보라색 연합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념적 격차가 컸던 사민당과 자유당이 서로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정당이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서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었다. 즉 강력한 중도정당으로서의 기민당의 존재와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하는 의원내각제와 연립정부라는 특징이 각 정당들을 중도로 수렴하게끔 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각 정당 내부에서도 강경 보수나 강경 진보 그룹이 아닌, 합리적인 중도 그룹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효과를 낳았다. 정권 창출을 위해서는 기민당이라는 중도정당과의 연합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민당과 자유당 내에서도 자신의 이념만을 강조하는 진영보다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타협을 중요시하는 중도 그룹들이 점차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994년 선거는 기민당이라는 중도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네덜란드 정치지형으로 인해 보수, 진보 정당들이 정책적으로 수렴하면서 오히려 기민당이 제외된 연립정부의 탄생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는 정당체제뿐만 아니라 실제로 네덜란드 시민들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많은 네덜란드 시민들은 종교나 계급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고정된 정당 선호를 갖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색채가 정치를 포함해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고정된 정당 지지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기민당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정치가 작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종교적인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세계화와 탈산업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특정 정당의 일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당시의 환경이나 정책에 따라 선호하는 정당을 바꾸는, 이른바 유동층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1994년 선거는 이러한 경향이 그 이전 어느 선거보다 뚜렷하게 표출된 선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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