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인터뷰 내용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농민의 손에서 위대함을 느낀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그것을 하는 것이다."
 "목표란 나침반 같아서 우리가 어디로 향해 나아갈지 알려 준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한 번쯤 들어본 문장이다. 이에 어울리는 사람을 꼽는다면? 유명한 철학자,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인 기업가, 혹은 스포츠 스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전남 나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생운동의 시기를 거쳐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최연소 도의원과 시장, 그리고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신정훈 의원에게 어울린다고 하면, 무리일까?

 

신정훈은 대학 시절 스물세 살의 나이로, 미문화원을 점거했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으며 5.18 광주학살과 관련해 미국에 사과를 요구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도 당시에는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며 용기 낸 사람. 열심히 공부하고 사색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요구를 알고 있었다. 또 자신이 어디도 가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비록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에 초점을 맞춰 평가받고 있지만, 투쟁 과정과 방식을 결정하는데 있어 창의적이었다. 도의원과 시장으로, 그가 만든 정책 역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역사의 주인, 시대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이제 나라의 주인을 위한 일꾼이 됐다. 진정한 자유인, 국회의원 신정훈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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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신정훈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학생운동가 신정훈과 그 이후의 신정훈은 잘 알려졌다. 유년 시절 신정훈이 궁금하다.

 

내 마음의 절반 이상은 할아버지께 물려받았던 것 같다. 60년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집 굴뚝에 연기가 나면 거지들이 몰려왔다. 할아버지는 거지들을 보고 나에게 "아가, 손님 오셨다. 모셔오너라"라고 말했다. 사실 거지는 더럽다고 집 밖에서 밥을 주거나 식거나 상한 밥을 물에 말아서 줬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거지를 집안으로 들여 겸상하고, 꼭 당신 앞에 놓인 따뜻한 밥을 내줬다. 정작 당신은 식은 밥을 드셨다.

 

할아버지는 집 문간방에 서당을 짓고 훈장을 모셔와 당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나는 너무 어려서 다니지 않았지만, 형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종종 나를 불러 "아가, 너도 이다음에는 개글(한글)을 배우지 말고 우리글(한문)을 배워라"라고 했다. 가끔 "애달프다. 세상이 금수(禽獸)로구나"라는 말씀도 했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철종 12년 OOO를 정 3품 통정대부 OOO에 봉한다'라고 쓰인 조상의 교지를 보여줬다. 비록 일자무식(一字無識)으로 농사꾼에 불과했지만, '당신이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사업도 하고 사회적 활동도 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부터는 나주 배를 재배하는 과수원을 했다. 그때는 지식이 많지 않아, 농약을 직접 만지다시피 하면서 제조해 사용했다. 농약을 뿌리기 위해서는 펌프질을 해야 했는데, 자주 내 몫이 됐다. 해진 양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 펌프질을 하면 농약이 날리는데, 농약 묻은 마스크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아버지 얼굴에 선크림을 바른 것처럼 하얗게 농약이 묻곤 했다. 내가 도움이 많이 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과수원에 자주 나갔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은 서울로 왔다. 학업에 대한 의지가 강했나.

 

초등학교는 내가 살았던 면에서 나오고 중학교는 읍내에서,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그리고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진학한 것은 작은형의 조언이 컸다. 그때만 해도 그냥 개구쟁이였다. 공부는 조금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나이에 벌벌 떨면서 처절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그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려대 정외과를 가려고 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정외과는 안 된다며 법대나 상대에 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정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던 것 같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가겠다며 "취업이 잘된다고 합니다"라고 안심시켰다. 그렇게 고대 신방과를 갔다.

 

- 학생운동과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을 주도적으로 했다. 고등학교 시절 목격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영향을 끼쳤나.

 

대학에 진학했지만, 마음속에 광주의 문제를 안고는 못살겠더라. '광주의 진실'과 '전두환 정권의 국민학살', 이 문제를 꼭 내 삶의 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4학년 때 광주 출신 학생들을 모아 서클을 만들고, 5.18 자료를 구해 서울 운동권 학생 연합에 전달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독일의 방송자료를 구해 고대 방송국에서 더빙해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활동하던 1985년 5월 20일 미문화원에 들어간 것이다.

 

미문화원에 들어갈 때 '우리의 과제가 독재정권 청산만이냐, 반미투쟁이냐, 아니면 수위를 낮춰서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상당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시작으로 그때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국민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은 '미국은 우리를 먹여 살려준 나라'로 믿고 있는데, 미국이 이런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민 끝에 우리는 '미국이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국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72시간 동안 미문화원을 점거, 대화를 시도했다. 사흘 후 자진 해산을 한 것도 투쟁의 수위를 조절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 국민들에게 미국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광주학살과 관련해 미국의 책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 이후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불과 23살이었다. 무섭거나 후회되지는 않았나?

 

당시 재판 영상을 보면, 내 모습이 지금과 달라 보인다. 우리는 그때 법정에서도 '전두환의 하수인이 우릴 재판할 자격이 없다'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다가 서대문 구치소 먹방(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또는 독방)에 15일간 감치되기도 했다.

 

물론 나도 무서웠다. 미문화원에 진입할 때도 새파랗게 질려 떨면서 들어갔다. 그때 미국이라는 존재는 워낙 대단했다.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긴 하겠지. 징역은 10년 정도 살겠지. 전기 고문은 아니어도 물고문은 당하겠지' 등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용감해서 들어간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상적으로 무장이 돼서도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솔직히 나는 그랬다. 그때는 '광주 학살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했던 신군부를 종식시켜야 한다. 한반도 대미관계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는 순수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옥중 생활 근 3년을 잘 버텼다. 주로 철학·경제학 등 교도소에 있으면서 공부도 많이 했다. 마르크스주의·제3세계 혁명사·세계철학사·변증법 등을 공부하며 사회에 나가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저임금 노동자와 더불어 저곡가(低穀價) 정책으로 희생당한 농민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을 설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1987년 7월 8일 석방돼 고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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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최형락)

 

- 고향으로 내려와 농민 운동, 그중에서도 수세거부운동을 시작했다. 농민을 조직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느 날 영산포 성당에서 열린 조그만 모임에서 날 초대했다. 운동권 학생이 내려왔다고 하니,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모락모락 김이 날 듯 따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소설 <상록수>의 등장인물처럼 농촌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성당은 농민문제를 고민하는 청년들의 근거지였다. 이 민중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농민들과 어떻게 첫 만남을 맺을 것인가'를 생각하던 중, 청년들이 보고 있던 '수세거부' 유인물이 눈에 띄었다. '수세(水稅)'라는 것은 농지개량조합에서 수로를 관리해주면서 받는 조합비였다. 농사짓는데 사용하는 물에 세금을 부과한 것인데, 농민들에게는 농지세보다 더 큰 세금이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농민 봉기의 계기도 만석보 수세다. 조선시대에 시작돼 일제의 수탈 도구가 된 수세가 농민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몇 달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각 마을을 다니면서 수세제도의 부당함을 교육했다. 젊은 친구들 10명이 사무실을 하나 내 마을마다 방송을 하고 다니면서 나주 전체를 돌아다녔다. 당시 나주수세대책위원회 총무였는데, 해남·순창·아산·영월까지 다니며 농민들을 교육했다. 그렇게 농민을 조직했고, 대개는 비주류들이 우리를 선호했다. 기득권은 비아냥거리기만 했다. '을 중의 을'이 우리에게 '힘내라'며 1000원, 2000원씩 보태줬다. 불과 1년이 채 안 돼 1800만 원이 됐다. 그렇게 치열하게 활동하며 마을수세거부대책 위원회, 면 단위 수세거부대책위원회, 군 단위 수세거부대책위원회 등을 밑에서부터 조직해나갔다.

1987년 12월 29일 열린 '나주농민대회'는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규모 군중집회였다. 정치는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대선에서 패배해 오갈 데가 없었지만, 비주류 민초들은 철옹성 같이 들고 있어났다. 그리고 1989년 2월 13일 '서울 여의도 농민항쟁'까지 전국수세거부대책위원회의 싸움은 계속됐다. 결국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정권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농민들의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한 마지기 당 수세를 25킬로그램(kg)에서 10kg로, 그다음에는 5kg로 낮췄으며, 마침내 1995년 수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 농민운동을 주도하던 운동가가 제도권 정치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수세제도 개혁 싸움 초중반이던 1989년 노태우 정권이 본인들이 몰린다고 생각하고, 당시 물세를 걷는 기관이었던 농지개량조합의 조합장을 선출직으로 바꿔버렸다. 조합장은 전남지역 10대 기관장 중 하나였다. 이런 조합장을 직접 선출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1992년에 처음 지방의원을 선거로 선출했고 1995년에서야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했으니, 농지개량조합장 직선제가 얼마나 앞선 일이었겠는가.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은 조합장 선거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는 제도권의 힘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의리가 있는 사람을 찾아봤다. 가난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늘 앞장서서 싸우고, 돈만 생기면 우리들에게 국밥이라도 사 먹이는 형님이 있어 후보로 내세웠다. 끝까지 안 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다 하고, 형님이 의회에 들어가시면 철저히 엄호하겠다'고 꼬드겨 출마시켰다. 그런데 선거를 치르기 일주일 전, 나를 포함해 운동하던 이들 모두가 구속됐다.

 

수세문제 해결 과정 중 행정기관인 군청이 조합이 거둬야 하는 수세를 직접 거두면서 우리를 회유하고 분열시켰다. 군청이 이 문제에 많이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수에게 문제제기를 하러 군청에 가면, 직원들이 100명씩 나와서 막아섰다. 당시 군수는 꽤 인격자여서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려고 했으나, 안기부․기무사 등에서 파견된 이들이 군청직원을 동원해 계속 수세를 걷으러 다녔다. 그래서 어느 날 다른 농민과 함께 군수실로 찾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군수는 백성들의 어버이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똥을 담은 봉지를 던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와 내 동료들이 모두 구속됐다.

 

선거를 앞두고 우리는 구속됐지, 무지렁이 형은 출마했지, 정말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초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결국 선거에서 그 형님이 세 표 차이로 승리했다. 기득권 세력은 돈으로 우리를 격파하려고 했지만, 을이 모이니 민초들의 마음도 모였다. 나중에 이 형님은 재선까지 했다.

 

대중운동과 제도권 정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어떻게 하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까. 민초들을 조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챙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 1995년 최연소 도의원에 당선되고, 이후 시장까지 됐다. 선거 당시 어리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나.

 

수세문제로 조직된 힘이 1990년 탄생한 '전국농민회'의 바탕이 됐다. 그 이후로도 우루과이 라운드·쌀 개방·고추 싸움 등을 지속해나갔다. 1995년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농업문제를 가지고 제도권에서 싸워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무소속 농민 후보로, 도의원선거에 출마했다. 상대 후보는 평민당의 공천을 받은 현직 도의원으로, 김대중 총재가 나주까지 유세를 왔다. 당시 현장에서는 '나이가 어려 경험이 부족하니 어떠니…' 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나는 당선을 의심치 않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권자인 농민과 주고받은 눈빛이 거짓이 아니라면, 당연히 내가 되리라 믿었다. 선거 운동을 열심히 했고, 결국 이겼다. 서른두 살, 최연소 도의원이 된 것이다.

 

전남 도의회에 가보니, 75명 중 민주당 의원이 절대다수였다. 힘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싸웠다. 도청 이전 문제부터 지방 농정에서 자행되는 잘못된 점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내가 도의회에서 악을 쓰면, 항상 지방신문 1면에 톱기사로 나왔다. 1998년 두 번째로 도의원이 돼서는 무소속·자민련·신한국당 의원들과 함께 교섭단체를 만들었다. 비록 성향이 달라 오래가진 못했지만, 이 지역에서 민주당 일당독재의 폐해를 해소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다.

 

민주당의 지역패권주의는 내가 단체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마다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지역의 패권적 정치가 과거 독재정권과 싸울 때는 필요했지만,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의사가 반영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치분권전국연대'를 조직해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그 결과, 무소속으로 나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 자치분권운동과 국가균형발전 운동·혁신도시 운동·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운동을 지속했다.

 

- 2009년 KBS 드라마 <시티홀>의 실제 모델이 '나주시장 신정훈'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드라마 주인공인 신미래 시장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조금 아쉽지는 않나.

 

당시 드라마 출연 제의도 있었다. 드라마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패권 정치인, 주인공 신미래는 이들에게 탄압받는 비주류 시장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직접 출연하면, 인기는 오를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이 불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연을 고사하고, 작가들에게 내가 시정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전해줬다. 드라마에서 신미래 시장을 '신 시장'이라고 부르며, 내가 시행했던 정책이 언급되니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묘했다(웃음).

 

이후 <시티홀>의 신미래 시장은 여러 책에서도 언급되곤 했다. 선대인 소장의 <세금혁명>(더팩트 펴냄), 김태일 고려대 교수의 <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코난북스 펴냄)에도 등장한다. 그분들은 신미래 시장의 모델이 나인지 모르실 것 같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말해야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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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최형락)


- 나주시장 재직 시절, 지역에 필요한 정책은 어떻게 발굴하고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나?

 

항상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시장이 되고 보니, 지방자치가 10년이 지났는데도 지방에서는 기존 법령으로 규정된 일만 하지 실제 현장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추진할 때도 시의회로부터 '당신 말은 일리가 있지만, 관련법과 지침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또 '선심성이니, 불법이니, 위법이니' 하며 공격을 당했다. 실제로 관련법이 없는 정책을 만들어 예산을 편성하면, 정치적인 논쟁이 불거졌을 때 불리하다. 그래서 조례를 제정했다. 무소속 시장으로 나주 시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조례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장직을 수행하며, 민생 조례를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나주시 자치법규를 보면, 주위 다른 시·군보다 조례가 많다.

 

- 대표적인 '신정훈'표 정책이 있다면?

 

2003년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지원조례를 만들었다. 서울시 무상급식 논란이 2011년에 있었으니, 그보다 훨씬 앞서 시행했던 정책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학교급식의 질이 형편없었다. 군대급식보다 못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농촌의 강점이 신선한 먹을거리인데, 당시 우리 아이들은 정부미를 먹었다. 쌀 생산 지역 아이들에게 정부 곡창에서 몇 년 동안 묵힌 쌀을 먹인 것이다. 당시 정부미 가격과 시중 쌀 가격 차이가 컸기 때문인데, 시에서 친환경학교급식조례를 만들어 가격의 차이를 보전해주기로 했다.

 

당시 나주시 재정자립도는 12%였다. 행정자치부는 WTO 규정에 어긋나는 과도한 개입이라며 수정할 것을 제의했다. 그럼에도, 학교급식조례를 제정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 두 번째는 식생활 그 자체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아이에게 내 지역의 농산물을 먹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유통체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이 지역 학교급식에 들어가는 작물 재배용 체험농장도 만들고, 학교급식 센터도 만들었다. 이를 보고자 전국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마을공동급식은 농번기만이라도 점심을 공동급식으로 해결하자는 생각에서 시행했다. 동네에 50가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가장 바쁜 농번기 때 50가구가 각자 밥을 하면, 얼마나 비생산적인가. 그래서 점심을 같이 차리자는 취지였다. 인건비는 시에서 제공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게 마을회관에 음식을 마련해 급식을 제공했더니, 명절 때나 북적이던 마을회관이 사람들로 매일 북적였다. 농촌 인심이 살아나고, 공동체 문화도 살아났다. 여성 농민의 일손도 덜었다. 밭에서 키운 채소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현재 마을공동급식은 농림부 정책 중의 하나로, 계속 시행되고 있다.

 

농기계 임대은행 제도도 있다. 농가 대부분이 농기계를 직접 산다. 1년에 15일 정도 쓰자고, 한 대에 1억∼2억 원 하는 트랙터를 빚을 내 산다. 그래서 시에서 농기계를 구입해 수리·보관·임대까지 하며, 빌려 쓰는 실비만 내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와 함께 갈수록 고령화되는 농민을 생각해 농기계를 대신 작동해줄 '농작업 대행 사업단'도 구성했다. 이 정책은 '신정훈'표 나주시의 정책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의원의 발의로 '농기계임대방안을 담은 농업기계화촉진법 일부개정안'으로 제정됐다.

 

- 시장 재직 시설, 꼭 해보고 싶었는데 시행하지 못한 정책은?

 

마을택시 제도다. 농촌 복지의 핵심은 '이동'과 '교통'이다. 농촌 노인들에게 이동 복지가 얼마나 간절한지, 상상만으로는 모를 것이다. 시장 시절에 살던 마을의 버스 승강장은 한참을 걷고도 고개를 넘어야 있었다. 마을 노인들이 승강장에 가기까지 고개를 넘어가며 여러 차례 쉬어갔다. 아침 출근길에 그렇게 쉬어가는 노인을 보면, 아무리 바빠도 차를 세워서 태워 드렸다. 하지만, 그렇게 승강장에 도착한들 버스가 바로 오나. 재수 좋으면 30분, 놓치면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90개 마을에 버스를 늘리려고 했더니, 벽지노선 손실보상을 해야 하더라. 8억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었지만, 버스는 대중교통이라 정부지원도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로가 좁아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골짜기 마을이었다. 이런 마을에는 택시를 보내자고 했다. 당시 나주시에 350대의 택시가 있었는데, 택시기사의 월급이 100만 원이 채 안 됐다. 이들을 활용해 교통수단이 열악한 100개 마을에 마을택시를 운영하는 비용을 계산해보니, 약 3억 원이 들었다. 그런데 택시는 대중교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지원이 불가했다. 대중교통은 시간과 구간을 정해서 움직여야 한다며, 택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마을택시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더니, 선심성 정책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장이 접수됐다. 지역 국회의원에게 부탁했지만, 결국 부결됐다. 그래서 마을택시 제도는 7일 천하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제도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꼭 시행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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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최형락)

 

- 2003년 현직 단체장 '최초로'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절실함이 있었나?

 

나주시장 시절, 좌표를 '지방분권 운동가'로 정했다. 내가 주장했던 것은 수도권과 지방, 지방에서도 대도시와 지방 중소도시 간의 정부 기능을 분담하자는 것이었다. 과거 수도권이 발전했던 이유는 정부부처가 집중적으로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고, 지방 대도시는 도청 소재지라는 이유로 발전했다. 이제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했으니, 그동안 집중되어 있었던 것을 분산해보자는 주장이었다. 소위, '다핵거점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행자부 김두관 장관과 함께 광주에 있던 노동청·병무청·국세청을 나주로 옮기는 작업을 시범사업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김두관 장관 후임이던 허성관 장관이 이미 정부 예산까지 다 제출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항의 차 정부종합청사에 갔다가, 말로는 설득이 안 돼 정문 앞에서 4박 5일 동안 1인 단식농성을 했다.

 

처음에는 경찰이 저지하려 했는데, 내 기세가 드셌는지 못 끌어냈다. 농성 중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청사는 광주에 두고 혁신도시는 나주에 만들자는 빅딜을 했다. 이것이 나주에 광주전남혁신도시가 만들어지게 된 출발점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농성한 사람은 나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고 한다. 왜냐면 대통령이 다니는 길이라 농성은 정부청사 뒤에서만 허용된다고 하더라. 청사 앞에서 농성한 최초이자 마지막 사람인 셈이다.

 

- 줄곧 무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했다. 정당에 합류한 계기는 무엇인가. 

 

지금껏 현실에 충실한 정치를 했다. 이상을 갖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치라는 방법으로 해결해왔다. 매번 시대에 주어진 나의 몫을 냉철하게 생각했다. 학생운동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농민운동가에서 도의원까지는 농민들의 권익신장과 지위향상이 나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나주시장을 거쳐 지금의 국회의원까지 지방분권과 정치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와 싸우고 있다. 작은 틀에서 보면 각각 개별적인 과제지만, 끊임없이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큰 틀에서 보면 시대적 과제이자, 시대적 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주시장 시절만 해도 지역패권주의를 개선하는 것이 시대의 중요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당일색'의 지역 정치로는 정치가 좋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에서는 민주당과 다른 정치를 통해 시민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앙 정치로 가게 된다면 그때는 정당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앙 정치는 정당과 정당이 겨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으로 정치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한 새정치민주연합을 선택했다.

 

정치는 개별 계층의 문제를 푸는 것 같지만, 공동체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즉, 하나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전체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대개는 농민운동을 했으니까 농민문제를 푼다고 생각하고 지방에서 활동하니까 지방의 문제를 푼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국 사회의 문제이자 대한민국의 문제를 푸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정치나 시민사회의 논의를 보면, 전체를 보는 문제의식이나 해결방식보다는 부분만 떼어서 따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작은 것과 큰 것, 부분과 전체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국회의원인 지금 나에게 달라진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현재 '개혁'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개혁의 방향은 무엇인가.

 

당 혁신위원회에서 '당권재민(黨權在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당에 여러 가지 과제가 있겠지만, 그 방향은 마땅히 국민과 당원이 정치의 주인이자 우리 당의 주인으로 역할과 권리를 다 할 수 있는 정당이 되는 것이다. 의원 130명을 위한 정당, 선거에 한번 써먹기 위한 정당, 중앙당 위주의 정당은 시민의 삶의 터전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는 정당이다. 본말(本末)이 전도된 현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 국민들을 위해서 일하고, 국민들 스스로가 주인이 돼 자기 발언권과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정당으로 변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이 개혁하고 변화한들, 선거제도가 변하지 않으면 시민의 목소리가 지역주의 등에 묻힌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이 필요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독일식 비례대표제도 고려해볼 수 있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 여러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정치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시민의식과 정치의식이 성숙한 만큼 선거제도의 변화 역시 중요한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 1년이 다 되어 간다. 어떤 활동에 집중하고 있나.

 

나주·화순 지역구 의원으로, 나주 혁신도시를 제대로 만들고 낙후된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에 목표를 뒀다. 또 한국의 식량산업을 책임지는 의정활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치적 소수자인 농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현실과 짧은 의정활동 기간 등 목표한 바를 다 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주어진 쟁점과 목표한 의제를 꼭 법으로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정활동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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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최형락)


- 의원실 벽에 커다란 농민의 손 사진이 걸려 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세상을 만들어가는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저 무지렁이들의 손이다. 저들의 손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저들을 보라. 자신은 밥 한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아끼고 아껴 자식을 키웠다. 그들이 판사·의사·국회의원 등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주류가 된 것이다. 나는 농민의 손에서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위대함을 느낀다. 맞잡았을 때 거칠고 부르튼 그 손이 나를 항상 겸손하게 만들고, 또 바로 잡아 준다. 그들의 손이 어릴 적 할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손이라고 생각한다.

 

- 아내 주향득 선생도 '농민운동의 잔 다르크'라고 불리던 농민운동가다.

 

1989년 군수실에 똥물을 던졌을 때 아내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재판 결과 집사람은 집행유예로 나오고, 나는 징역을 살았다. 재판이 있기 전 수감돼 있으면서 나와 아내가 몰래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유팩을 펼치면 나오는 은박지에 자국을 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남사와 여사를 오가며 화장실 똥을 푸던 사람을 통해 주고받았다. 일종의 러브레터였던가 싶다(웃음).

 

사실 우리 집사람은 아가씨 때부터 나보다 더 영웅이었다. 농민을 위해 몸을 던져 헌신했을 뿐 아니라, 마이크만 잡으면 대중적으로 훨씬 말도 잘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기도 많았다. 당시 집회에 참여한 사람이 1만 명이 넘었으니, 노총각만 몇백 명은 됐을 것이다. 아내에게 몰래 감 등을 가져다주는 남자들도 많았고, 부모들이 와서 만나겠다고 줄 서 있을 정도였다. 감옥에 있으면서 아내가 '신정훈 면회 간다'는 핑계로 만날 수 있었으니 결혼까지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것 같다. 또 열심히 활동한 덕에 감옥도 갔으니 아내와의 결혼이 용인됐지, 그냥 아내를 데리고 갔다면 주변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며 20·30대를 보냈다. 인생 선배로, 지금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상황이 너무 척박해서 과거 내 이야기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올해 스물다섯 살인데, 내가 딱 농민운동을 시작한 나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나와 같은 인생을 살아라. 이 길을 걸어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청년들이 사회의 '공동의 선(善)'을 항상 중심에 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혼자 잘사는 것'보다 '함께 잘사는 것'에 대한 삶의 의제를 고민했으면 좋겠다. 혼자 잘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길 같지만, 결코 수월하지 않다. 오히려 함께 잘사는 길은 곳곳에 있다. 하지만 잘 보지 못하고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이념·운동·정책에서 찾았다. 최근에는 비즈니스 시각으로도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내가 시행하거나 시행하고자 했던 농기계임대은행, 마을택시 제도도 일자리다. 커뮤니티 비즈니스 영역인 셈이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빈자리에 '사회적 기업'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이런 기회와 아이디어를 청년들과 나누고 싶다. 작지만 소중한 일을 통해 청년들이 성공하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신정훈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혼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을 깨달아야 자유가 온다.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할 때 비로소 자유가 온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더욱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단히 그릇된 생각이다.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무한한 세상에서 한 부분을 살고 있다는 자각, 자기에게 맡은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에까지 책임지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 인터뷰: 2015년 6월 17일

인터뷰이: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전공 민호기, 정리: 민호기,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오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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