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인터뷰 내용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동거 비난 말라! 유연한 결합, 출산율 올린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열악한 정치 상황, 감성 정치 필요하다"


진선미, 그의 삶은 1999년 호주제 위헌소송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성 소수자·여성인권과 같은 사회적 편견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녀의 삶을 지켜보던 지인들이 오죽하면, '네가 정치인해라. 직접 들어가서 바꿔라'라고 말했을까.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의원이 된 것은 그녀가 선택한 퍼즐, 즉 '돛'과 '사람'이었다. 현재 그 돛은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편견에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부서지지 않고 순항 중이다. 

"예측이란 것은 어렵지만 때로는 예측 가능하다. 지금은 모르지만 조금씩 만들어져서 어느 순간에는 변화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이 새로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전에 다 준비된 뭔가와 연결되어야만 가능하다." 

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진선미'다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활동반자등록법', 그러나 그 역시 사회의 갖가지 편견과 얽혀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동반자. 짝을 찾는 것은 개인의 자유인데, 사회가 '짝'의 의미를 '동반자'라는 의미를 너무 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뒷받침해 줄 제도가 부족했던 탓은 아닐까?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동반자'를 좀 더 넓게 보는 인식과 제도가 정비될 시점은 아닐까?  

"'결합'을 혼인으로만 단정 짓고, 결혼을 통해 확산된 가족만 인정해주는 사회다. 그러나 이미 바뀌었다. 누군가는 결합 자체에 대한 불안감과 그로인해 생기는 관계에 대한 부담감, 비용 부담 등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출산율 역시 낮아지고 있다."

"말을 안 할뿐이지, 이미 우리의 삶 속에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가족이 많이 존재한다. '아빠-엄마-자녀'가 꼭 혈연관계가 아닌 경우도 있다. 또 독거노인은 얼마나 많은가. 자매들끼리 살기도하고 이모와 조카가 살기도하고.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사회적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하면 안 되나? 실제로 재산분쟁 때문에 자식들이 노인들의 혼인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재산분쟁 때문에 자식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동거는 비난받기 쉽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호받으면서 유연한 결합이 권장되면, 친구처럼 연인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다양한 형식의 '결합'을 권장하고, 유연한 결합을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확대하자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우리의 변화된 삶을 뒷받침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선미 의원은 "일어날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침몰의 의미는 한국 전쟁과 같은 상처를 전 국민에게 안겨줬다. 그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정신과 전문의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정치인으로 "지금 최고로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적정하게 분배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단연코 문제제기를 하고, 분노하며, 투쟁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그. 귀를 열지 않은 사람의 귀를 열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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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보조개가 인상적이다. 법조계, 정치계 모두 남성이 월등히 많은 곳에서 온화한 미소는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손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딜레마에 빠진 원인이기도 했다. 위로 오빠만 넷이 있는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남자 사회에 익숙한 편이다. 이후 법대를 나오고 변호사가 되기까지도 여성 친화적이지 않았다. 물론 고시공부를 할 때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변호사로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부딪힌 것이 웃음과 보조개였다. 변호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단호해야한다는 선입관이 있어 날카로워보여야 한다. 그런데 잘 웃는데다가 보조개가 들어가니, 귀엽다거나 편안하다는 이미지로 비쳐졌다. 나 스스로도 그런 사회적 이미지에 매몰돼 보조개가 핸디캡이라는 생각에 항상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도 보조개와 웃음이 국회의원의 무게감과 신뢰감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좀 줄여야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는 분도 있다.  

웃음이 장점이 될 수 있겠다고 깨달은 건 변호사가 된지 7~8년 후였다. 당시 '덕수'라는 로펌에서 근무했는데, 정말 훌륭한 변호사가 많았다. 그런 선배들을 볼 때마다 '다들 저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데, 나는 왜 이렇게 감정적이고 기복이 심할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천성을 가진 사람이고, 생긴 대로 살자!'고 정리가 되더라. 그때부터 약간 블루오션 같은 새로운 문이 열렸다. 새로운 의뢰인을 만나면 "생각했던 변호사 이미지와는 달리 편안하네요?"라는 말을 듣게 된 것. 연예계나 문화계 등 일반적으로 변호사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됐고, 내 삶 자체가 조금 풍요로워 졌다. 보조개에 새삼 감사하고 있다. 

변호사 시절부터 비교적 예민한 이슈를 다루다보니 비판과 비난에 담담한 편이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이 무거운 상황이라 "우리 모두 힘내야지, 우리 모두 웃으며 삽시다"라고 하는데, 정작 정치인이 웃으면 "이 상황에 웃냐?"라고들 한다. 그때는 마음이 좀 아프다. 힘든 상황을 이겨나가는 '진선미만의 비책'이라고 인정해주시고 '왜 웃냐?'라는 말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 1984년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왔다. '청년 진선미'는 어떤 학생이었나?

남들보다 2년을 앞서 여섯 살에 초등학교 갔고, 태어난 동네에서 여고까지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으니, 정말 어렸다. 그런데 6개월 만에 내 인생 모두를 책임져줄 것만 같은 6살 연상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18세 꽃다운 소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삶의 모든 것이 된 듯 연애하며 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겼다. 내 인생의 중요한 정점들이 조금 늦게 찾아온 것 같다.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위기를 느꼈던 것은 1995년이다. 그때 처음으로 심한 회의감이 들었다. 너무 심각해서 5개월 이상을 변호사 2차 공부를 미룬 채 미친 듯이 다른 책만 보며 사람을 만났다.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단전호흡이었는데, 내 인생의 굉장한 분기점이 됐다. 단전호흡을 통해서 '지금까지 집중하고 살았던 삶이 굉장히 헛헛한 삶이구나', 한 인간으로서 내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진정성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최초로 했다. 그때 끊임없는 마음 성장, 인간 내면의 성장이 정말 중요하단걸 깨달았다.  

- 방황의 시간을 거쳐 변호사로 새 삶을 시작했다. 특히 변호사가 되자마자 '호주제 폐지운동'에 상당한 시간 공을 들였다. 계기가 궁금하다. 

'20대를 투자해서 얻은 자격증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가 연수원에서의 화두였다. 그 당시 '에코-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법 연수에 들어가자마자, 환경법학계를 공부했고 '환경운동연합'에 들어갔다. 그때 헬렌 니어링 작가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 펴냄)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책을 다 읽고 확인해보니, 옮긴이가 변호사였다. 이분을 꼭 만나보고 싶어 법전명부를 찾아봤는데, 한 10년 전 사진 그대로라 너무 무섭게 생겨 만날까 말까 고민만 했다. 그러던 중 지인과 이야기에게 '그 분을 한번 만나 뵙고 싶은데 무서워서 연락을 못했다'고 하니, '본인이 실무 담당이라면서 너무 좋은 사람'이라며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간 곳이 '법무법인 덕수'였다. 그곳에 책을 번역한 이석태 변호사가 있었다. 내가 운동권이었다면 '덕수'를 당연히 알았겠지만, 운동권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안 것이다. 더 신기한건 것은 마침 '덕수'에서도 나이가 좀 있는 여자 변호사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인연이 돼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함께하게 됐다. 정말 모든 것이 인연이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항상 큰오빠가 아빠 같은 역할을 했다. 더군다나 큰 오빠는 변호사로, 법조인의 길을 가는 선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문을 많이 구할 수 있었는데, 1998~99년만 해도 여자 변호사가 많지 않았다. 사실 변호사 사무실도 자영업이라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개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큰오빠가 '판사를 좀 해보라'는 제안을 하던 때라 스스로도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추석 때 큰오빠에게 "'덕수'라는 곳에서 일하러 오라는데요?" 했더니, 바로 "거긴 괜찮지!"라고 하더라. '덕수'에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거기서 왜 저런 애를 오라고 하지?' 하는 이상한 표정으로 신기해하더라.(웃음)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수'를 가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석태 변호사는 인생의 멘토이다. 그분은 남자변호사였지만 여성 사회에 있어 정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계셨다. '덕수'에 들어간 지 5개월쯤 됐을 때 호주제 문제를 법적으로 추진해보고자 모임을 꾸렸다. 또 그 때가 동성애자를 정신병자로 분리한 것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개선하자며, '동성애 인권 운동'이 발족된 때다. 그것이 이슈가 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정을 쏟은 '호주제 폐지운동'이 진선미라는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변호사 초기인 1999년 초에 시작해 위헌 판결이 나고, 민법에서 호주제 조항이 폐지되고, 호적 제도가 개인별 신분등록으로 바뀌어 2008년 호적법이 폐지되기까지 10년이 흘렀다. 당시 사회적으로 굉장히 뜨거웠던 이슈였는데, 내가 머리채 잡히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할 만큼 '을사오적'이라는 말도 듣고 공청회장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 특히 성균관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유림 어르신들께서 "너는 성대에서 뭘 배웠느냐!"며 크게 반대했다. 전통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시점에 전통이 맞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벗어던져야 한다. 이처럼 온갖 반대와 말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위헌 판결을 받아내고, 법이 개정되고, 제도가 바뀌는 과정을 10년 동안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값진 경험이다. 지금도 너무 감사하다. 이를 통해 느낀 것은 '사람보다 제도가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제도가 사람의 의식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선도하지 못하는 시점이 되면, 그 제도는 오히려 구성원에게 족쇄가 된다.

특히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사람들이 항상 있었던 것 같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비난도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 일을 고마워하며 격려해주는 분을 만나면서 앞으로 내 인생에서 함께 갈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를 만났다. 막내딸로서, 여성으로서, 여성 법조인으로서, 나에게 인생의 표상이 되어준 너무 좋은 언니들을 만난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분들은 언론인, 한의사, 여행가, 정신과 의사 등 저마다 자신의 영역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법조인 선배는 아니지만, '여성이 저렇게 멋지게 나이들 수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앞서 걸어가는 여성상(像)을 현실감 있게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언니들이랑 매일 울고 웃고 위로하며 살았던 경험이 매우 중요하고,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길을 가야하는 나에게 불안감보다는 연대감을 느끼게 해 줬고, 위안과 용기를 줬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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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만났고, 지금도 부부로서 서로 응원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아직 비혼(非婚)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있었을 텐데, 둘만의 스토리가 궁금하다. 

올해로 만난 지 30년인데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우린 정말 다르다. 그 사람은 경상도 출신에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냉정하고 철학적이고 비관적이지만, 술 한 잔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전라도 출신에 매번 방방 뛰는 감정적이고 단순하고 낙관적이고, 게다가 술꾼이다. 사실 우리가 캠퍼스 커플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인연은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18살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모든 것은 다 그 사람을 통해서 겪었고, 시시콜콜 모든 과정을 함께한 가장 좋은 친구다. 내 인생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람이랄까.

18살,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살던 동네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을 만큼 시골이었다. 1학기 때는 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러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생겼다. 과제물을 내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과대표를 도와주며 장난치다 그만 그 친구 것을 빠트렸다. 내가 실수했으니 사과하고, 다시 써달라고 부탁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책임을 져야하니까 용기 내 찾아갔는데, 얼마나 한심하게 봤겠나. 처음으로 그 사람과 대면한 순간이었다. 근데 참 신기한 게 사람이 한번 보고나면, 어디선가 자주 보게 된다. 6개월 내내 같은 95번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그렇게 민망한 대면을 하고 난 후, 바로 다음날부터 버스에서 보이더라. 그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했다. 당시 그 사람은 당연히 서울대를 갈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균관대를 오게 돼 우울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애가 자꾸 나타나 웃으며 인사하니까 뭔가 싶었던 거다.

이후 자주 마주쳤는데, 알고 보니 음흉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웃음) 그때까지도 유일한 외식이 자장면이었는데, 그 사람이 '명동에서 칼국수 먹고 가라. 커피 사주겠다, 케이크 사주겠다'는 등 항상 날 꼬셨다. 지금까지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구경은 그때 그 사람과 처음으로 했다. 6살 많은 아저씨가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나한테는 신(新) 경험이었다. 그 사람에겐 비관적이고 우울한 자신에게 늘 웃고 있는 내 얼굴이 햇살 같은 느낌이었다더라. 결국 중요한건 그때 먹을 것에 넘어가서 지금 내가 밥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업을 잘 쌓아야 한다.(웃음)  

결혼은 연수원 2년차 때 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너무 바빴고, 이미 14년 연애하고 결혼하다보니 혼인 신고를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주제 모임이 시작되고 사례 발굴을 해야 했는데, 하나는 '이미 혼인신고를 해서 잘 살고 있는 부부가 다시 무호주 신고'를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사례'로 이 두 가지로 위헌소송까지 한 것이다. 혼인신고를 하고도 이렇게까지 무호주 변경신고를 해서 소송을 준비하는데 '아예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나도 혼인신고를 하고, 다시 무호주 변경신고를 해서 사례자가 되어볼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주변에서 반대하더라. 변호사에게는 무엇보다 객관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남편과 둘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왕 할 거면 소송에 이긴 다음 그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제도가 바뀌는 데까지 10년이 걸렸다.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남편도 결혼에 대해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사실 이런 제도의 궁극적인 문제가 '아이들이 차별 받을까봐'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유산하고 아이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훨씬 더 호주제 문제에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결국은 2008년까지 혼인신고를 미뤘고 개인별 신분등록제에 대한 논쟁도 계속 하다 보니 '혼인신고 굳이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남편과 14년 동안 함께 잘 지냈고, 또 혼인신고 안하고도 10년 동안 잘 지냈는데, 우리가 아이도 없고 집을 살 것도 아닌데, 갑자기 법적 절차를 확인받아야하나 싶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고민한 게 2012년 비례대표 신청할 때였다. 여의도 바닥은 구설수도 많고 왜곡도 많다. 게다가 '동거녀 국회의원'은 처음이지 않나. 그래서 잠깐 혼인신고를 고민했는데, 그 순간 울컥했다. 사실 난 자발적 선택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보기도 했지만, 그건 당연히 감수해야하는 부분이라 생각해 고민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조차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 공천심사 면접 전날 남편과 1000개의 퍼즐을 맞췄고, 면접 당일 1조각이 빠진 999개의 퍼즐을 가져갔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에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의미였다"고 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 

처음에 퍼즐을 맞춰보자고 했더니, 구박받았다. 1000피스가 그렇게 어려운 건줄 몰랐다. 날을 꼬박 샐 수밖에 없었다. 다 맞춘 후, 비례대표 공천심사장에 '돛'과 '사람' 두 조각을 빼서 가지고 갔다. 

예측이란 것은 어렵지만 때로는 예측 가능하다. 지금은 모르지만 조금씩 만들어져서 어느 순간에는 변화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이 새로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전에 다 준비된 뭔가와 연결되어야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하나만 빠져도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비례대표를 준비하는 과정이 나에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었다. 비례대표 공천신청을 하려고 보니, 여태껏 뭘 하면서 살아왔는지 이력과 앞으로 뭘 하며 살고 싶은지 계획을 써서 제출해야했다. 그런데 10년 내내 현안에만 붙들려 살다보니, 내가 내 삶을 정리해본 적이 없더라. 이력조차 정리해본 적이 없고, 글도 하나 써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의 정치계획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변호사 13년의 삶을 처음으로 정리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호주제 폐지 당시 기사를 보고, 또 그때 썼던 기고문을 보면서 몇 번을 울었다. 공천 면접 보는 날 새벽까지도 '난 떨어져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내가 퍼즐을 가져가야 할 의미가 확실해졌다. '내 인생이 이러했고 내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한 조각 퍼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유치찬란하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다.(눈물) 시인, 영화제작자, 화백 등이 공천심사위원으로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기에 가져갔던 분홍색 보자기를 펼쳐 퍼즐을 보여줬다. '이런 삶을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니 이런 것 같다'라면서 마지막 한 조각 퍼즐인 '돛'을 채우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면, 그 퍼즐을 완성하는데 한 조각의 퍼즐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왔다'고 했다. 공천심사위원에게도 그 감동이 전달이 된 것 같다.

- 배우 하리수의 성명권 분쟁사건, 임태훈 소장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 변론, 최진실 유족과 조성민 간 친권분쟁 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인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페미니스트인가? 

여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소수자라는 느낌을 갖고 살았다. 작은 시골에서 여학생이 느낀 환경적 차별은 굉장히 컸다. 급한 일이 있어서 아침에 일찍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기사분이 '첫 손님이 여자면 그날 장사는 끝났다. 재수가 없다'며 출발하고 도착할 때 까지 욕을 했다. 그 말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울지 않았지만, 택시에서 내려 펑펑 울었다. 그때 상황은 꿈에서도 나타나 괴롭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골에서는 차별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미리 조심했다. 등록금을 제때 못 내거나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맞던 시절이었다. 사실 황당한 거다. 그때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울분이 쌓였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덜 맞았지만, 가난한 시골 여학생이 겪은 차별은 컸고 고통스러웠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열심히 기분 좋게 상담도 잘했다. 어떤 의뢰인은 "꼭 여자변호사여야 하냐", "불안하다", "쟤가 날 위해 싸워주겠냐, 건드리면 울겠다"는 등 여자 변호사가 낯설었는지 선배 변호사 방으로만 가더라. 법정에서도 젊은 여자가 변호사석에 앉아 있으면, 법정을 정리하는 직원이 "여기에 앉으면 안 되니 저쪽에 앉으라"고 하더라. 그 사람에게도 여자 변호사가 많이 낯설었던 거다. 이처럼 어딜 가도 "넌 여자잖아"라는 시선이 많았다. 내가 페미니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겪어온 상황 때문에 페미니즘이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페미니즘·페미니스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끝없이 욕을 먹고 테러를 당하면서도 문제 제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여성 변호사로 초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면서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한 대 때리면 "왜 때려요?"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다음 사람은 덜 맞는 것이다. 사회는 그렇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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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생활동반자등록법'을 추진 중이다. 이에 대해 동성애 합법화에 대한 우회적인 선택이라는 비판도 있다. 법안에 담긴 진선미의 진심을 알고 싶다.

나도 내가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어느 날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홍석천, 하리수, 임태훈 소장까지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 어느 날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험난한 인생을, 그것도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시대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결합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권리다. 

우리는 '결합'을 혼인으로 단정 짓고, 결혼을 통해 확산된 가족만 인정해주는 사회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 누군가는 결합 자체에 대한 불안감과 그로인해 생기는 관계에 대한 부담감, 비용 부담 등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출산율 역시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형식의 '결합'을 권장해주고, 유연한 결합을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확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생활동반자등록법'의 중요한 취지다. 

얼마 전 프랑스 현지 조사를 다녀왔다. 결혼하지 않은 채 세 자녀를 키우는 부부를 만났는데, 아이들에 대해 아무런 차별이 없다더라. 우리도 좀 그러면 안 되나? 부모가 어떤 형태의 결합을 했는지 상관없이 아이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철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출산율 증가도 주목할 만하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았던 프랑스가 최근 출산율 2퍼센트(%)이상 증가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생활동반자법' 때문에 높아진 것인지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지만, 결혼에 대한 부담이나 아이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것도 출산율 증가가 가능했던 이유 아니겠나. 

일반적으로 '아빠-엄마-자녀'로 이뤄지는 가족이 행복한 삶의 최상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유연한 '결합'을 통해 복지와 삶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인생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파트너를 만들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하자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계속 차별 받아야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허위의식 때문에 말을 안 할뿐이지, 이미 우리의 삶 속에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가족이 많이 존재한다. '아빠-엄마-자녀'가 꼭 혈연관계가 아닌 경우도 있다. 또 독거노인은 얼마나 많은가. 자매들끼리 살기도하고 이모와 조카가 살기도하고.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사회적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하면 안 되나? 실제로 재산분쟁 때문에 자식들이 노인들의 혼인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재산분쟁 때문에 자식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동거는 비난받기 쉽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호받으면서 유연한 결합이 권장되면,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다양한 형식의 '결합'을 권장하고, 유연한 결합을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확대하자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우리의 변화된 삶을 뒷받침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바쁘게 살아 온 것 같다. 직업적으로 하고 싶은 일 말고, 사람 '진선미'가 꿈꾸는 이후의 삶은?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외국 6개 도시에서 각각 6개월 씩 3년을 보내고 싶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미국의 뉴욕, 또 스페인의 어느 한 도시, 그리고 인도의 다람살라(Dharamshala)등. 특히 다람살라에 가서 달라이 라마 승려를 봤는데, 개인적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꿈은 수행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성장, 영적인 고민, 종교적인 고민을 하면서 수행자의 도시에서 공부하며 살아보고 싶다.

- 다사다난한 2014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정치인의 몫은? 

정치는 본(本)라고 생각한다. 본(本)은 '뿌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영어는 '탄생', 불어는 '좋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인으로서 삶 속에서 가지고 지켜야 할 기조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부족한 자원을 가장 합리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배분하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현명하게 조율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치력의 문제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제기 또한 정치인의 역할이다. 적정하게 분배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단연코 문제제기 하고, 분노하며, 그것에 대해 투쟁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할 때에도 이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하는 다양한 논리와 다양한 태도와 표현 방식을 연구하고 고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귀를 열지 않은 사람들의 귀를 열어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귀를 열게 하고 있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데 '지금 그만큼 하고 있나'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 상황 자체가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현안에 휘둘리다보니 고민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 같다. 정치인으로서의 해결 방안을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있다. 정치의 근본에 대한 재성찰, 그리고 새롭진 않더라도 사람들이 수용 가능한 정치를 하고 싶고 '감성 정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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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이 중요하다. 내 인생의 풍요로움을 제공했던 건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따뜻해져야 한다.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다보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생기고, 좋은 사람들과 더욱 풍요로워 질 수 있다.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 진선미에게 자유란? 

자유를 얻으려면,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저항하듯 나에게 있어 자유는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출발이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의 시작부터였다. 호주제 투쟁을 시작하면서 나를 둘러싼 수많은 억압과 틀에서 노련하고자 했던 노력 가운데, 자유가 생겨난 것 같다.

고리타분할 수 있지만, 그 고리타분함에 전해지는 이야기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중요하다. 남의 불행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좋은 뜻에서 출발했지만, 방식의 차이가 있고 사사로움이 들어갈 수 있고 변화가 올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온전히 다 포용돼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는 담담하게 바라보고 최적의 방안을 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미움을 갖지 않고, '동시대 어려운 상황을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갖고 싶다. 

결국 인생에서 보면 다 자신의 몫인 것 같다. 결정도 자신이 내려야하고, 내가 해야 할 몫임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없는 것 같다. '자유자재'함을 얻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다. 수많은 원망과 수많은 미움과 수많은 욕심에서 벗어나는 그런 최고의 자유, 그것이 진정한 나다움이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 2014년 9월 16일
인터뷰어: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전공 박주연, 인터뷰 정리: 박주연,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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