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인터뷰 내용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自由人 인터뷰 55> 가수 한영애

조회 수 2196 추천 수 0 2014.08.07 11:24:23

"내 노래, 늘 시대와 같이 갔다"
"뜻대로 사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


대중 앞에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나 아직 노래하고 있어요" 하고.   

무대 위의 짙은 카리스마보단, 수줍고 따뜻한 눈을 가진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아티스틱(Artistic)한 '한영애'다. '소리의 마녀, 대한민국 블루스의 여제, 한국의 멜라니 사프카, 재니스 조플린'을 만나러 온 이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이야기하는 것 보다, 마주 앉아 눈물이 그렁한 청춘의 상한 마음에 더 관심이 있다. "지금 많이 아프세요? 우리는 누구나 그 시대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요. 모두가 아픈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 그녀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지난 4월은 지독하게 아팠다.  

올봄부터 무대 공연을 하고 있지 않다. '함께 살자'라는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의 아픔에 대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그녀의 지고지순(至高至純)이리라. 

"음악이라는 것은 마음의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거라 생각해요. 서로를 믿고 인정하며 이해하며 아름다움을 도모하는 일 말이에요. (…) 공연 중에, 함께하는 악기연주자와 코러스를 소개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워요.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조화를 이뤘다는 기쁨, '고마웠다 수고했다 재밌었다' 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요." 

'한영애'에게 음악은 '조화를 이루는 일, 함께 사는 일'이다. 그녀를 영원히 자유롭게 하는 무대 위에서 그렇게 '나와 네가 조율'을 이루며 노래한 세월이 벌써 40년이다. 80년대 엄혹한 정치 질서는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무대 뒤 복장 단속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할 뿐이다. 시종일관 자신보다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했던 그녀가, 2014년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첫째로 자기 자신을 꼭 신뢰하라는 것, 둘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말라는 것'을 꼭 나누고 싶어요."

우리 시대의 소중한 '코뿔소'처럼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리고 다른 '코뿔소'가 넘어지지는 않았나 세심하게 살피는 한영애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코 힘을 힘힘 뒷발을 힘차게 차고 달린다 코뿔소 흠 / 뒤돌아 볼 것 없어 지나간 일들은 이미 지난 일 흠 / 저 멀리 봐 저 멀리 앞을 봐 음 코뿔소 / 코뿔손 넘어지지 않아 / 남들은 다리가 둘이어도 코뿔소는 다리가 넷넷 (…) 언젠가 코뿔소가 누운 날 사람들은 '코뿔소가 누웠구나' 그냥 그러겠지 / 일어나 코뿔소 모두가 남은 아냐 내가 있잖아 / 다시 해봐 눈을 떠라 코뿔소'(2집 <바라본다> 중 '코뿔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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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한영애. ⓒ프레시안(최형락)

-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다. 지난 2013년 연말 대학로 소극장에서 블루스가 있는 'Merry Blue's Mas'라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했다. 이후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

넉넉하게 잘 쉬었고, 지금은 앨범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11월에 나올 앨범준비에 들어갔다. 10년 만이다. 올여름은 이렇게 보낼 것 같다. 

- '소리의 마녀, 마성의 목소리, 대한민국 블루스의 여제, 한국의 멜라니 사프카, 재니스 조플린' 등의 타이틀이 늘 따라다닌다. 물론 그런 타이틀도 좋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리는 '나무님'이라는 애칭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나무를 참 좋아한다. 20대 친구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나무'에 '님'을 붙인 것뿐이다. 나무를 보면 그냥 좋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특별히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 참 좋다. 뿌리가 땅속 깊이 박혀 있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인생의 비밀이 그 안에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떨린다.  

- 70년대 중반, 신촌 한 카페에 '이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자애가 나왔다'라고 해서 여러 사람이 '한영애의 노래'를 들으러 왔다. '이상한 목소리'라고 할 만큼 당시 '한영애의 소리'는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예상하던 여성 보컬의 음색이 아니었다. 노래하면서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나? 

없었다. 음반을 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자기중심적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 노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염두에 두진 않았던 것 같다. 내 목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할 뿐이었다.

- 한영애 1집 <여울목>(1986)을 내기 전인 1977년부터 '해바라기'와 '신촌블루스' 등 그룹 활동을 했다. '네 명이서 노래할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1/4만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3/4과 합쳐져서 하나가 될 수 있다. 테크닉이나 성량을 높이는 것을 자제하고, 화합하는 힘을 길러야 했다'라고 했는데, 소리를 절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그때는 지금처럼 녹음하는 채널이 많지 않아, 채널 두 개로 녹음했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해바라기'에서 녹음할 때면 목소리가 제일 작은 사람이 맨 앞에 서고, 그다음이 중간에 서고,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이 뒤에 서서 녹음했다(웃음). 음악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마음의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인데 해바라기 활등을 하면서 이 음악의 기본을 터득했던 것 같다. 

물론 이 기본은 솔로를 하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기의 소리와 다른 연주자들, 코러스와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이다. 결국, 음악을 한다는 것은 서로를 믿고 인정하며 이해하며 아름다움을 도모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한영애'의 독특한 소리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어떤 공연은 여러 세션들, 코러스들이 함께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코러스가 없을 때도 있고, 피아노 한 대로 노래할 때도 있고, 2인조, 10인조와 함께할 때도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코러스가 솔로의 보조역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코러스는 또 다른 영역의 솔로라고 생각한다. 코러스와 함께 무대에 서는 이유는 솔로와 솔로가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공감대를 더욱 극대화하는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공연하면서 함께하는 악기연주자와 코러스를 소개하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 내 이름만 돋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이야말로 나를 빛나게 해준 사람들이다.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하나의 세살을 만들어냈다는 것, 조화를 이뤘다는 기쁨. '고마웠다 수고했다 재밌었다' 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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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자유극장>의 배우로서 또 다른 인생의 시간을 보냈다. 당시 연극은 '한영애'에게 무엇을 의미했나?

'탈출구' '비상구' 같은 거였다. 단순한 이유에서 연극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나는 당시 록음악을 하고 싶었고, '해바라기'는 통기타 그룹이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너무 지르고 싶었는데, 하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소개를 받고 연극을 하는 곳에 갔는데, 맨발로 소리를 지르며 대사를 읊고 춤과 노래를 하면서 '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목마름이 있을 때 나를 닮은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연극에 푹 빠졌었다. 일본, 유럽 투어도 다니면서 연극 활동을 열심히 했다. 

- 해외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무엇인가.  

유럽 순회를 자주 나갔다. 어린 나이에 느꼈던 것은 한마디로 '청춘의 자유'였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탈(脫)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유럽에 가보니 곳곳이 다 고향 같고 만나는 사람들이 친구 같았다(웃음). 개인적으론 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외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 서로 다른 듯하지만, 동시대의 아트(Art) 등에 대한 상상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는 시간이었다. 

-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누군가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고, 누군가는 고문을 당해 소리 소문도 없이 죽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대중문화는 물론이며 예술계 전반에서 '표현의 자유'가 탄압받던 시기였다. 무대에서 마주한 '시대적 아픔'은 무엇이었나? 

나는 누구나 '시대적 아픔'을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앞에 나가서 행동하고,  누군가는 중간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뒤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다. 선택은 각자에게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삶이 있지만, 앞에 서지 않았어도 누구나 아팠다.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모두가 아픈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다. 

- 예술가의 감수성은 일반인의 감수성보다 풍부한 면이 있다. 감수성의 문제 또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규제 등의 이유로 주변에서 허용되지 않는 물질을 사용한다거나,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흔들리지 않았는지?

흔들리지 않는 청춘이 어디 있겠나. 나는 아주 어설픈 자기 명상과 어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인간은 누구든지 생로병사가 있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웃음). 그런 게 확실히 힘이 되었다.  

- '음악은 시대의 소리를 노랫말로 담는 과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영애'의 노랫말과 무대는 항상 시대를 앞서 갔던 것 같다. 1996년 KBS <빅쇼> 단독 콘서트에서 단발머리 가발에 왕관을 쓰고 한 공연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나는 내 노래가 늘 시대와 같이 갔다고 생각한다(웃음). 다만, 우리에게 다양성의 관점에서 많은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시선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도 규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밝은 노란색 가발을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짙은 감색 가발을 써야 했다. 좀 답답했다. 어설픈 데로 가는 거였다. 특별히 내 옷만 검사하러 온 적도 있다(웃음). 

외국에서 미적으로 뛰어나거나 아티스틱(Artistic)한 사람들이 나와서 용감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왜 저런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하는 서운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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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가수 '한영애'는 포크로 시작해, 블루스, 록, 테크노, 트로트, K-pop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평했다. 본인도 '세상에 알려진 모든 리듬을 섭렵해 누가 나의 정체성을 묻는다면 혼합장르이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특히 '나를 닮은 노래를 찾아 그 노래가 오면 부른다'고 했다. 좋은 노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냥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내 정체성을 두고 있다. 좋은 노래란,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진 노래다. 잘 쓰인 노랫말과 잘 만들어진 멜로디를 잘 노래해야 하고, 연주도 잘해야 한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노래 같다. 선험(先驗)적인 노래도 좋지만, 경험(經驗)적인 노래를 통해 나를 닮은 좋은 노래를 하고 싶다. 

- '대중음악가'와 '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할 것 같다. 대중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거나 또는 지키고 싶은 것은 없는가? 살면서 후회했던 적은?

일상에서는 옆집 사람이고 싶다(웃음). 살면서 후회한 적 많이 없다. 내가 잘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별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후회한들 다 지나간 것인데 무슨 소용인가(웃음). 다만 언젠가 나를 위한 소설을 써보니까 '아! 그때 단추를 그렇게 끼웠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갈 수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 '음악'과 ‘자본’의 간극은 어떠한가. 조금만 스타일을 달리하면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대중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벌수도 있지 않은가?   

팔리기 위해서 음악을 해본 적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 열심히 했다. 1집 <여울목>의 '건널 수 없는 강', 2집 <바라본다>에 '루씰' '누구 없소' '바라본다' 같은 노래가 히트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라고 하면서 곡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못하겠다. 

- 연예계라는 곳이 소문에 민감한 곳인데, 사람들의 이야기와 시선, 부정적인 평가에 신경 쓰이지 않는지. 무엇보다 "음악생활에 성실하지 못할 때는 내 목소리가 아주 듣기 싫을 때도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극복하나? 

세상을 내 입맛에 맞출 수는 없다. 실제로 공중에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말이 떠다니는데, 그것을 다 끌어다가 나에게 가지고 올 필요는 없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떻게 내가 그게 아니라고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대신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

자기 확신이 없을 때 속상할 때가 있다. 극복은 아주 간단하다. (물론 안 될 때도 있지만) 연습하면 된다. 

- 공연이 끝난 뒤의 마음은 어떤가.   

아무런 마음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귀에 '삐~' 하는 이명(耳鳴)밖에 남지 않는다. 빈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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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인터뷰 내내 '함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노래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세상에 함께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격의 차이와 선택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무와 벌레와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유기적인 존재이지 동떨어진 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으면 좋겠다. 

- '한영애'와 가장 닮은 노래하면, '코뿔소' 아닐까? '코뿔소'는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이자 내 자신이고 내 동료,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생명 그 자체인 것 같다. 2014년 '한영애'에게 '코뿔소'는 누구이며 또는 무엇인가?  

'코뿔소'는 자기 자신들이다. 1988년 이 노래를 발표한 이후, 계속 수정됐는데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이기도 하고 랩을 하기도 했다. 가사는 고(故) 이승희 씨가 쓴 건데, 당시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강원도 태백에 사는 남자의 이야기라고 들었다. 신체가 불편한 부모가 맞벌이를 나가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차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사람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 세상에서 쓰러지면 안 되지'라는 생각으로 가사를 썼다고 했다.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일어나 코뿔소' '모두가 남은 아니야, 내가 있잖아' 등의 가사를 추가하기도 한다.  

- '한영애의 공연'은 자선 공연을 비롯해 환경보호 행사,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 누군가를 추모하는 공연 등 어떤 주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공연을 찾아다니는 건가, 아니면 다녀와서 돌아보니 각각의 의미가 있는 행사였던 건가. 

유독 그런 공연 섭외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네 사는 일이 다 행복해지기 위함이 아닌가. 

- 앞으로의 꿈은? 

현재에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짧게는 11월에 발표되는 앨범 작업이 잘되는 것, 길게는 잘 늙는 것(웃음).

- '은빛 찬란한 물결 헤치고 꿈을 찾아야 하지만('여울목' 가사 중)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는 것('조율' 가사 중)'이 나를 비롯해 요즘 젊은이들인 것 같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첫째로 자기 자신을 꼭 신뢰하라는 것, 둘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말라는 것'은 꼭 나누고 싶다. 청춘 시절, 내가 좀 더 나를 믿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 '한영애'에게 자유란? 

지금 나에게 자유는 무대다. 무대는 영원한 나의 자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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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인터뷰: 2014년 6월 17일
인터뷰어: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선임연구원, 정리: 손어진, 조경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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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래, 늘 시대와 같이 갔다" "뜻대로 사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 대중 앞에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나 아직 노래하고 있어요" 하고. 무대 위의 짙은 카리스마보단, 수줍고 따뜻한 눈을 가진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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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9
  • 조회 수 2524

"한국 대중문화, '자본의 개'가 됐다" "비평은 '아카데미즘' 아니라 '저널리즘'이다" "난 운동권 싫어했어. 걔들도 나를 무진장 싫어했고." 투박하지만, 웃음 띤 얼굴로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운동권 친구들...

<自由人 인터뷰 53> 가수 윤영배 imagefile

  • 2014-06-18
  • 조회 수 2010

"멘토? 남의 얘기 들어서 뭐하나" "사람은 '바뀐다'기보다는 '넓어진다'" 몇몇 사람의 난폭한 결정 /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틈틈이 틈내 입을 맞추는 / 비밀주의 기회주의 눈이 부시게 번쩍거리는 / 형식주의 신자유주의 나쁜 사...

<自由人 인터뷰 52>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imagefile

  • 201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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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부패한 '관료 행복 국가'의 참사" 개천가의 붉은 장미가 만발하다. 아름다운 5월이라 더욱 슬프다. 만개한 꽃들과 안산 단원고 정문에서 시작한 노란리본 물결은 서울 시청과 청계광장으로, 전국 구석구석으로 너울져 ...

<自由人 인터뷰 51>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후보, 성공회대 교수 imagefile

  • 2014-05-13
  • 조회 수 2009

"세월호, 한국 사회 풍향 바꾼 대사건" "질문이 있는 교실, 우정이 있는 학교" 아침 7시 30분, 그 이름도 우습기 짝이 없는 0교시 수업을 시작으로 꼬박 다섯 번의 수업이 진행된다. 점심을 먹고는 세 번의 수업이 더 이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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