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인터뷰 내용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自由人 인터뷰 54> 음악평론가 강헌

조회 수 2523 추천 수 0 2014.07.29 10:44:11

"한국 대중문화, '자본의 개'가 됐다"
"비평은 '아카데미즘' 아니라 '저널리즘'이다"


"난 운동권 싫어했어. 걔들도 나를 무진장 싫어했고." 

투박하지만, 웃음 띤 얼굴로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운동권 친구들에 시비 걸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국문학과 졸업 후엔 어쩌다 보니 음악 대학원에 들어갔고, 이후엔 난데없이 영화판에 들어갔다. 그리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노동 관련 영화를 찍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학생은 공장에서 노동자와 합숙 생활을 했다.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어땠느냐고 물었다. 시종 장난기 넘치던 그는 나지막이 '모르던 걸 많이 봤지'라고 말하고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목격했던 일이 고요함 속에 알 듯 모를 듯 전해졌다.   
 
한껏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예술 영역인 영화 제작에 있어서도 주제에 따라 국가 권력이 얼마든지 시비(是非)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법정에 서기도 했다. 영화사전심의제도 위헌 소송으로 5년간 질긴 세월을 보낸 후, 1996년 승소했다. 

"당시 나는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비록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와 검열은 끝났지만, 어쩌면 정치검열보다 더 가혹한 자본의 검열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는 법정에서 싸울 수 있지만, 자본에 의한 통제는 전선이 없다."

어느 날 후배가 쥐여 준 50만 원 덕에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음악 평론가가 됐다. 그러나 "음악이나 평론을 미친 듯이 사랑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며 다시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서 음악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그 콘텐츠가 탄생하는 시대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담고 있다. (중략)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의 본질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음반 산업은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중략) 상업영화, 상업음악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의 개'가 되었다."

무심한 척, 그러나 우리 사회의 아픔에 참견하며 사는 그의 삶이 마치 음악과 같았다. 본인이 의식했든 못했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삶 속에 시대의 흐름이 담겨 있었다. 방향 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듯 걸어온 그의 이력은 하나하나가 디딤돌이 돼 하나의 길이 됐다. 꽉 막힌 세상에서 억지로 다른 이들과 발걸음을 맞추며 '내가 틀린 건 없나' 끊임없이 곁눈질하는 청년들에게 "꼴리는 대로 살아라. 생각보다 인생은 짧다"고 던질 수 있는 이유다. 방을 빙 둘러싼 책장에 빼곡히 자리한 책과 음반, 그 안에서 뻐금뻐금 담배를 펴는 배 나온 아저씨가 유독 멋져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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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평론가 강헌. ⓒ프레시안(손문상)

-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은 음대로 갔다. 대학생 강헌의 삶은 어땠나. 

대입 재수생일 때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듬해 봄, 입학한 대학 학생회관 건물에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대학생활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과가 과인만큼 주변이 거의 운동권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운동권 골수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옆에서 딴죽을 걸곤 했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출세할 야망으로 공부해 서울대에 들어온 아이들이 책 몇 권 읽었다고 정의가 어쩌고 혁명이 어떻고 하면서 흥분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열성적인 운동권 동기들과 '10년 뒤에도 너희가 운동권이면 내가 너희를 존중하겠다. 지금 내가 보기엔 너희가 혁명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라면서 싸우기도 했다. 

스스로 만든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 말고는, 학교생활이 싫었다. 군대는 더 가기 싫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게 됐는데 국문과는 생각도 하기 싫었고, 누군가가 음대 작곡과에 이론 전공이 생겼다고 해서 들어가게 됐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음악이 직업이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대학원을 마치자마자 바로 영화판으로 뛰어들었다. 

- 독립영화와 민중영화 제작 단체였던 '장산곶매' 대표를 하는 동안 <오! 꿈의 나라>(1989), <파업전야>(1990), <닫힌 교문을 열며>(1992) 제작에 참여했다. 대학 시절 운동권을 싫어했다고 하지만, 이후 참여했던 영화를 보면 사회운동과 뗄 수 없다.  

독립영화를 하게 된 것은 영화판 문을 두드릴 때 처음 만난 친구가 그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산곶매' 활동을 하다 보니,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일도 하게 되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집행위원도 하게 됐다.(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진압 도중 경찰(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학생운동은 불붙듯 일어났고, 당시를 '강경대 정국'이라고 불렀다. 편집자) 물론 독립영화고 운동권 영화라고 했지만, 나를 포함해 동료들을 운동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호스티스물(hosstess movie)나 액션물(action movie)로 도배한 기존 영화와 다른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영화를 찍고 싶었던 젊은이들이었을 뿐이다. 

<오! 꿈의 나라>를 만들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돈을 내고 보러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앞으로 정말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라고 반성했다. 당시는 대학을 갓 졸업한 변영주 감독이 민예총에 졸병으로 막 들어왔을 때였다. 후배들에게 <오! 꿈의 나라> 다음으로 노동자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영화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장면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중에 공장에 가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돈도 없고, 경험도 없는지라 모두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술도 먹이고 협박도 하면서 어르고 달래서 강제로 동의를 이끌어내었다(웃음). 

결국 우리는 노동운동 영화를 찍기로 했고, 우선 아는 게 없으니 공부부터 하자고 했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부터 당시 민주노조 사례에 이르기까지 조사도 열심히 하면서 공부했다. 조를 짜서 서울 구로공단과 인천 부평공단 등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또 투쟁 중이던 공장에 전원이 투입돼 밤을 새며 취재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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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그렇게 하다 보니 길이 뚫렸다. 당시 노조원들이 공장을 점거해 위장 폐업한 공장이 많았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으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1990년 <파업전야>가 나왔다. 난 영화를 찍기 시작할 즈음에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고, 남은 사람들끼리 영화를 찍었는데 그것이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든 작품이 됐다. 내가 없어서 그런지,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더라(웃음). 그때 돈으로 제작비가 약 2000만 원 정도 들었는데, 노조원과 합숙하며 찍었기 때문에 거의 들지 않았다.  

사실 영화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바로 안기부였다. 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설립된 노동단체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지향했다. 1995년 민주노총 설립과 함께 해산됐다)가 결성되자, 안기부는 노동자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물리력을 동원해서 방해했다. 그 여파로 사람들이 열 받아서 <파업전야>를 봤다(웃음). <파업전야>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실제로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켰고, 그해에만 30만 명 넘게 봤다. 제작은 '장산곶매'가 했지만, 홍보와 마케팅은 안기부가 한 셈이다. 

제대하고 나와서는 간이 부었는지, 이번에는 대기업 관련 영화를 찍자고 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매년 어마어마한 규모로 파업을 했다. 바로 울산으로 내려갔다. 

1990년 봄, 이른바 '골리앗 투쟁'으로 많은 노동자가 희생됐다. 그해 가을부터 6개월 동안 울산에서 살면서 취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 봄, 파업하는 순간부터 영화를 찍기 위해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노조의 도움으로 현대중공업에 처음 들어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광활한 조선소는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전부 영화 세트장 같았다. <파업전야>를 찍었던 수도권의 중소기업 공장과는 크기가 달랐다. 그런데 1991년 봄부터 지금까지 (1990년 당시와 같은 의미 있는 대규모) 파업이 없다(웃음). 그래서 영화를 못 찍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제일 아쉽다(웃음).

- 대중문화 역사적으로 볼 때 1996년 10월 영화사전심의제도 위헌 소송에서 승소한 일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후로 대중문화의 다양화가 더욱 촉진되고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다. 소송 배경이 무엇인가.  

'현대중공업 파업'에 관한 영화를 못 찍게 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른 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와 관련한 '참교육' 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가 영화였다. 우리는 관계 당국의 '요주의 집단'이 됐고,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이지 않는 방해가 시작됐다. 그때부턴 정말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모르는 전화가 걸려오고, 장비를 빌려주기로 했던 곳이 난색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를 제작할 때 한번 스케줄이 밀리면, 어마어마한 손실이 난다. 그렇게 영화를 찍기 시작한 지 3분의 1도 안 돼 전교조와 공동으로 마련한 제작비가 바닥났다. 그때부터 돈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돈은 끊임없이 들어가는데 진척은 없고, 마지막에는 밥값이 없어 영화를 못 찍는 상황까지 몰렸다.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화가 났다. 당시 방송국에 정의로운 피디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겪는 과정을 취재했다. 그 결과,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과장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촬영 필름을 일본에서 완성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여오려는데, 당시 필름은 통관금지 품목 중 하나였다.(포르노 영화 때문에 필름은 마약과 같은 급의 통관 심사를 거쳐야 했다. 편집자) <닫힌 교문을 열며>가 사전심의를 받고 찍은 영화도 아니었기 때문에 심사를 거쳐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밀수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들여와 많은 사람이 보며 화제가 됐지만, 우리는 결국 기소당했다. 

-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끝까지 진행했던 이유는?  

당시 '장산곶매' 대표였던 나는 계속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당시 우리 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영화법·공연법 위반으로 기소된 상태였는데, 전부 유죄판결을 받았다. 나도 법정에 서게 됐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서 민주주의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 김형태 변호사는 당시 신참 변호사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수임료라고 줄 수 있는 건 50만 원밖에 없었는데, 피고인인 내가 변호사한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김형태 변호사가 열심히 일했다(웃음).

김형태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영화를 찍었다(웃음). 당시는 증인심문 등의 절차를 생략한 채 대부분의 재판이 법정에서 소리만 지르다 끝났다. 그런데 김형태 변호사는 문화부 과장도 증인으로 부르고, 나를 지지하는 증인도 불러 법정드라마를 찍었다. 그때 우리 쪽을 변호한다는 것은 영화 산업계에서 치명적인 일이었는데, <결혼이야기>(1992, 김의석 감독)로 충무로 대표 제작사가 된 '신씨네'의 신철 대표가 증언대에 섰다. 독립영화를 공권력이 탄압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며,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독립영화는 더 활성화돼야 하고, 국가가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참, 담담하게 증언했다. 그의 용기 있는 태도에 내가 더 놀랐다.  

결국 재판부가 위헌제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는데, 이는 사실상 재판부가 '사전심의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인정한 거다. 이후 4년 동안 재판이 중지됐다가,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위헌제청에 대해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나는 자동으로 무죄가 됐고, 해당법인 '영화법 4조, 12조에 의한 사전심의에 대한 법률'이 삭제됐다. 박정희 시대 때부터 표현의 자유를 검열한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형태 변호사가 진심을 가지고 해낸 일이다. 난 단순히 피의자였을 뿐,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다 김형태 변호사가 한 것이다(웃음). 

- 그렇게 영화를 찍다 음악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됐다. 어떤 사연이 있었나?  

먹물이라, 음악평론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계속 영화를 했을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구(舊)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문민정부인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국 운동권도 급속하게 와해했다. (당시 운동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졌고, 입지도 좁아졌다. 몇 년 동안 함께 독립영화를 찍었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할 수 있는 건 영화밖에 없으니 대부분 충무로로 갔다. 나는 본래 영화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무로에 가서 이것저것 눈치 보며 상업영화를 찍기는 더 싫었다.  

집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고,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당시 모 신문사 연예부 기자였던 과 후배 육상효가 찾아와서 자기가 잘 알던 '가수 김현식'의 생애를 다룬 책을 내고 싶은데, 음악 비평도 책에 싣고 싶다고 했다. 음대 대학원을 나오기는 했지만 음악에 관한 글을 써 본 적도 없고, 또 그런 글은 음악평론가가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하는 사람은 없으니 형이 쓰면 잘 쓸 것 같다'고 권하더라. 그래도 주저하니까 육상효 씨가 원고료 선불이라며 50만 원이 든 봉투를 손에 쥐여 줬다. 그 봉투를 보는 순간, '쓰겠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웃음). 김현식 씨 음반을 수십 번 듣고 긴 글을 써서 보냈다. 그리곤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 그 책 <사랑의 가객>(솔출판사)이 5만 부쯤 팔렸다고 하더라. 그 직후, 비평을 본 방송국 피디와 신문사 기자들의 출연 요청과 원고 청탁으로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생각하면서 잠시 호구지책으로 음악평론을 시작한 것인데,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음악이나 평론을 미친 듯이 사랑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막상 하고 보니 재미를 느꼈다?  

일단, 돈이 됐다(웃음). 음악 듣기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 평생을 두고 좋아한 일이었으니, 재미있었다. 40년 가까이 <뉴욕타임스>에 음악 리뷰를 쓴 해럴드 션버그라는 클래식 음악 평론가가 있는데, 그는 "내가 40년 동안 해온 일은 이것밖에 없다"며 "(음악 비평은) 파바로티 같은 개런티가 비싼 음악가들이 좋지 않은 공연을 했을 때 씹어주는 것, 그리고 보석과 같은 재능을 가진 무명의 음악가를 음악 팬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음악 비평을 하고 있다. 

'비평'이라는 행위는 입장을 전달하는 행위지,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에 동의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발생하기도 한다. 비평은 '아카데미즘(academism)'이 아니라 '저널리즘(journalism)'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을 씹어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기도 했고, 옹호하는 사람은 심하게 옹호해서 또 다른 적을 만들었다. 밤길 조심하라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 문학계, 영화판, 가요바닥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대중음악 쪽은 정말 거칠다.   

한 번은 가수 김건모의 앨범을 엄청 비판했다. 김건모 씨가 훌륭한 자질을 가진 가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러고 나서 김건모 팬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우리 집에 전화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비판도 애정을 가진 행위라는 것을 잘 모른다. 정도 안 가는 앨범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

음악 비평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10대와 20대 때 좋아했던 김민기, 산울림, 신중현, 조용필, 양희은, 한대수 등과 같은 뮤지션을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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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헌정 앨범이나 헌정 콘서트 기획 및 제작 참여를 많이 했다. 특히 정치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정 앨범에 참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본인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헌정(獻呈)'을 한다는 것은 대중음악을 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대중음악은 한편으로는 예술이고, 상품이고, 그것의 가치나 품격이 때때로 의심받고 조롱당하는 예술이다. 헌정이라는 것은 대중문화 속에서 가치를 부여하고 역사화 시키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처음 만든 '들국화'의 헌정앨범이 굉장히 성공했다. 박노해 씨의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이었던 2004년, 그의 시를 바탕으로 노래를 제작해 헌정 앨범을 만들었다. 기존에 있던 노래와 새로 만든 노래로, 80년대의 문화적 충격이었던 시집을 음악으로 헌정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국문과 출신의 문학청년이었기에, 그 감정은 더욱 각별했다.(2004년 11월 결성된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이승재 LJ필름 대표를 중심으로 황병기·장사익·한대수·정태춘·신해철·싸이·윤도현·손병휘·김현성·언니네이발관·Ynot·김희정·윤선애·스탑크랙다운(이주노동자 밴드) 등 20년 전 '노동의 새벽'으로 대변되는 노동운동의 사회적, 문화적 파장을 공감하는 음악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편집자)

201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3주기를 맞아 추모 앨범을 만들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인간 노무현·정치인 노무현'은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제안이 왔을 때 달갑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02년의 열정이 문득 생각나면서 마음이 바뀌어 몇 달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 

정치인 헌정 앨범은 처음이었는데, 끔찍한 기억이 많다. 당시 '노무현'을 좋아하는 가수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데 헌정 앨범 작업에 대해서는 다들 겁을 먹고 있었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참여하기로 했다 못하게 된 경우도 많다. 우리가 정녕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정말 끔찍했다. '노무현이 무슨 정치범도 아니고, 한 나라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추모하는데도 이렇게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타격을 걱정해야 하는 희한한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앨범 작업에 동참한 많은 뮤지션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 '마이너리티의 예술 선언', '주류와 비주류의 행복한 2인 3각', '음악 열등국가가 만들어 낸 최후의 무대 콘텐츠-뮤지컬' 등 최근 진행하고 있는 강의가 내용도 풍부하고 주제도 다양하다. 강연 준비는 어떻게 하나. 
 
학술적인 부분에는 관심도 없고, 그쪽에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공부하는 것도 싫어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역사책 읽기를 즐긴다. 세계 뮤지컬 큰 손인 카메론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가 '도대체 어떤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느냐?'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내가 객석에서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역사가 재밌고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재밌다. 나는 그냥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다.    

- 강헌에게 '음악-시민(민중)'이라는 키워드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음악과 우리 시대의 모습이 땔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어떤 합일점을 가지고 있나. 

음악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그 콘텐츠가 탄생하는 시대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담고 있다. 본인이 의식했든 못했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표피 안에 숨어 있는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더 풍부하게 하고 즐기는 재미를 강화시켜준다.  

- 우리 세대가 꼭 기억해야 할 시대적 장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5.18 민주화운동 때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마지막으로 함락될 때, 그때 그 장면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실제로 2006년부터 1년 10개월 동안 광주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을 할 때 옛 전남도청 3층에서 일한 적이 있다. 밤에 정말 무서웠다. 대학에 들어와서 5.18에 관한 유인물을 읽으며 생각했다. 공수부대 진압군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바보천치도 아닌데, 고작 카빈총에 의지한 채 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전남도청을 사수하려 했던 걸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걸까. 정말 궁금했다. 광주에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도청이 외진 곳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꽉 막힌 곳이라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까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곳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군이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던 그 장면이 한국 현대사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사수하고자 했던 그 무엇,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 닥치는 대로 살았던 것 같다. 두렵지 않았나?

지나간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삶을 움직이는 유일무이의 기준은 '재미있느냐'와 '재미없느냐'이다. 앞으로 닥칠 일을 걱정하는 건 재미없더라. 그래서 안했고, 앞으로도 안 할 거다. 아직까지 책을 한 권도 못썼는데, '책을 좀 써야지' 하는 생각은 있다.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즐겁게 만드는 게 결과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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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2014년 현재 우리 대중음악을 평가한다면?

참혹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형적으로는 'K-pop 한류'라고 해서 대중음악 산업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학살하고 난 뒤 얻은 대가다.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순간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라고. 한국의 음반 산업은 IMF를 지나면서 한번 몰락했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극적 도약에 성공했지만,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런 것은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순간 존재하는 페이크(fake)일 뿐이다. 이제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처럼 아무 때나 바꾸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자나 소비자에게나 그냥 1회성 소비재일 뿐이다. 

우리가 음악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고 돈도 벌고 영향력을 누리고 싶다면, 음악 그 자체의 가치 즉,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소통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의해서 말이다.

- 자유를 토양으로 피어나는 문화가 현재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정치가나 권력자의 제일 큰 과제는 먹고사는 문제다. 21세기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문제를 어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비정규직 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용 안정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회정의를 무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새로운 사회 질서(비정규직)를 만들어냈다. 

더 비참한 것은 경쟁의 뒤처짐이 가지고 오는 패배의식이다. 이런 사고는 굉장히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쿠데타의 논리를 대중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살아남아 성공하면 모든 과정이 정당화된다'는 굉장히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의 울타리로 몰아간다. 이런 탐욕은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가장 나쁜 결과를 낳는다. '어차피 모두가 나쁜 놈'이라는 황폐한 생각 말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이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질서와 다르지 않다. 영화사전심의제도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아 검열이 없어졌을 때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기쁠 텐데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 비록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와 검열은 끝났지만, 어쩌면 정치 검열보다 더 가혹한 자본의 검열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는 법정에서 싸울 수 있지만, 자본에 의한 통제는 전선이 없다. 상업영화, 상업음악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의 개'가 됐다. 이들 모두 자본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얻는 것이라곤, 알량한 개인의 명성일 것이다. 

- 후배이자, 동시대를 사는 청년에게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얼마 전에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한다는 젊은 친구가 강연장에 찾아왔다. 음악 관련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도움을 좀 얻고 싶다고 했다. 들어보니, 주류 영화 시장이 좋아할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왜 꼭 대기업의 자본 투자를 받아서만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요즘은 DSLR 카메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왜 꼭 대형 상영관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개봉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냥 인터넷에서 올리면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도 있다'며 '자본에 의해 영화를 제작·배포·재생산하는 시스템에 도전하라'고도 말했다. '그렇지 않는 한 당신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씨제이(CJ)와 쇼박스(showbox)의 종업원이 될 것'이라는 가혹한 말도 덧붙였다.   

신자유주의는 레이건-대처 시대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에도 존재했고 20세기 초반에도 존재했다. 자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질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이다.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가난'이라는 질서 속에서 사람을 순치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하지 않는다. 한 번 가졌거나 가질 수 있었으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한 박탈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를 가지려고 자신의 원칙을 무장해제한다. 자본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자본에 굴복당하는 모습을 수십 년 동안 봐왔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나이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들이 있다.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그냥 '그래라'라고 했다. 싫다는데 어떻게 하나. 청년들에게는 이 한마디를 꼭 한다. "꼴리는 대로 살아라. 생각보다 인생은 짧다." 

- 강헌에게 자유란? 

내가 기획한 음악 페스티벌의 제목이기도 하다. 자유란 모든 것을 포기해도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이뤄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자유라고 칭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유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가장 역사적인 사기이다. 성인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가진 사회에서 왜 대의제 민주주의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299명에 의한 체제가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겠나. 정확하게는 150명만 딴 마음을 먹으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 혹은 뒤집을 수 있는 사회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작년 폴란드 여행길에 아무 생각 없이 장 마생(Jean Massin)의 <혁명의 탄생>을 가져갔다. 이 책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에 관한 것으로, 서문이 참 재밌다. 프랑스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유명한 위인들의 이름을 거리나 다리에 붙인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 그 어디에도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이 들어간 지명은 없다. 프랑스 대혁명 때 혁명의 배신자로 여겨졌던 미라보 백작도 그의 이름을 딴 다리가 있는데, 왜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은 없을까? 장 마생은 프랑스 대혁명 때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로베스피에르가 꿈꿨던 것은 공포정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공화주의, 즉 직접 민주주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혁명이 좌절된 것은 지금 우리가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가짜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를 모독한 과정이라고 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승리는 결국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사실상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든 게임에 불과하다고 그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로베스피에르를 기요틴(guillotine, 프랑스 혁명 당시 사형기구)과 동의어로 취급해, 그를 과격한 폭력주의자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어디에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장 마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인터뷰: 2014년 5월 30일
인터뷰어: 비례대표제청년포럼 김예리 부위원장, 인터뷰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선임연구원, 조경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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