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의 유럽르포'는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유럽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친밀감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미국 편향적인 모델을 지향해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우리 시민들도 이제 새로운 모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관급공사 '짬짜미' 하는 네덜란드?
<유럽르포23> ③ 합의의 나라, 네덜란드


한국에서 '신뢰와 시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네덜란드는 연초 지자체의 관급 공사 배정을 '담합'할 정도로 신뢰가 깔려 있다. 연초에 시청에는 신년 하례회 같은 형식으로 지역의 산업체들이 모이는데, 건설업체들이 모이는 날 그 해의 관급 공사를 결정한다. 시청에서 "작년에는 A사와 B사가 맡았으니 올해는 C사와 D사가 맡으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면 건설업체들이 순순히 합의하고, 시민들도 이에 별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입찰 담합이니 뇌물과 비리니 비자금이라고 난리가 날 텐데, 이곳은 이런 담합이 평온하게 진행되며 부실 공사도 뇌물도 거의 없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 관급 공사를 '나눠 먹기'로 배정해도 업체나 시민의 불만이 없을 정도로 '신뢰'가 축적된 사회, 그런 사회에서 운영되는 제도를 바로 수입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신뢰' 그 자체는 부럽기 그지없다.  

또한, 이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게 없는 것이 신뢰와 더불어 '시간'이다. 합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후발 주자인 한국은 이 시간이 항상 부족한 터. 우선 '신뢰'부터 고민하자. 그렇다면, '신뢰 구축'은 어떻게 가능할까. 

먼저 정부의 공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스히폴 그룹 내 정부 지분은 70%로 상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역시 투자자로서 스히폴의 수익 구조에 민감하다. 하지만 주무부처 장관은 공항 위반사항에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네텔렌보스(Netelenbos)는 스히폴 공항에 실제로 20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는 장관 개인의 정치력이나 양심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장관보다 내각제 정치인 장관이 가진 자율성이 더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정치인 장관체제의 부작용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순작용의 결과다. 이처럼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일 처리는 분명히 국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정보의 투명성과 원인자 제공의 원칙이 중요하다. 이는 '파이를 불만 없이 둘로 나누는 법'인 분배의 지혜와도 통한다. 먼저 한 명이 파이를 본인 생각에 따라 정확하게 절반으로 자르고 다른 한 명에게 이등분된 파이의 선택권을 먼저 준다면, 두 사람 모두 불만이 없을 것이다. 즉, 처분 권한이 없는 이들이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해 먼저 투명하게 제공함으로써 신뢰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스히폴 공항은 5번 활주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환경, 소음 규제 등 자신이 준수해야 하는 의무사항에 대해 홈페이지에 자세히 공지한다. 이를 통해 특정 항공편 항공 루트 정보를 검색하는 것도 가능해 실제 항로대로 운행하는지, 어떤 경우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비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상상력'과 '실용주의'다.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절충안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매번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의외로, 기술적인 문제나 일의 순서만 조금 바꿔도 양자가 합의할 수 있는 절충안이 나올 수 있다. 또한 '타협된 절충안'이 원칙과 명분은 훼손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조율해낸 것이라는 인식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기본은 '상대의 존재와 이해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알더스타펠에서는 반대 주민이나 운동단체를 '비국민'으로 몰아가지도 않고, 정부를 '토건족의 앞잡이'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상대편의 존재와 목표를 서로 인정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다.

물론 국가를 단순히 기득권층의 공동 사무국으로 보고, 계급 투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어떤 절충도 모순의 은폐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이런 합의 문화는 허울뿐인 이야기요, 팔자 좋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각자의 피해나 원칙의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미래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판'이나 '공통의 지평'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나중에 판을 뒤엎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차질 없는 추진'을 포기하라!

정부의 정책문서나 보고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바로 이 '차질 없는 추진'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차질'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이다. 더불어 지금 논의한 사항을 4대강 사업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설립, 밀양 송전탑 문제 등에 적용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절충안이 나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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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에서 검색한 '차질 없는' 대한민국.

4대강 사업의 경우, 네 개의 강 중 한 곳에서만 먼저 사업을 하기로 합의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예를 들어, 주민 찬성률이 제일 높은 강이나 사업 효과가 가장 크거나 작은 강을 선정해 사업을 진행하도록 하고, 이에 대해 협조하되 다른 강 공사는 유보하는 것이다. 반대 측 입장에서는, 어차피 물리력으로 공사를 끝까지 막을 수 없다면 네 개의 강 중 그나마 세 개는 살릴 수 있는 선택이다. 찬성 측 입장에서는, 실제 주장하는 강 살리기 사업을 성과로 보여준 뒤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강은 국민적 합의 속에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정의 경우, 해군기지를 다른 곳에 만들어 '구럼비 바위는 지킨다'는 선택 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논의가 불가능했다. 정부는 초기에 해군기지를 다른 곳에 지을 계획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강정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여러 불신을 자초했다. 찬성 측인 정부가 볼 때 해군기지 건설을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반대자는 종북 좌익 빨갱이였고, 반대 측이 보기에 공사를 강행하는 정부는 미국 패권 전략에 놀아나는 볼썽 사나운 세력이었다. 알더스타펠의 협의의 원칙인 '상대방의 존재와 입장에 대한 인정'은 그저 신선 놀음으로 느껴진다.  

밀양의 경우는, 대책위의 요구안이 절충안이라 바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그만큼 정부의 주장에 무리가 많다는 뜻이다. 공사를 중단해도 전력수급계획에는 차질이 없으니, 공사를 먼저 중단한 후 중재 기구를 통해 논의하자는 대책위 주장은 알더스타펠의 중재안이나 운영 원리와 매우 흡사하다. 당장 중단해도 전체 일정에 차질이 없는 공사는 일단 중단해야 한다. 설사 계획에 차질이 발생해도 중재 기구를 통해 이해 관계자가 모여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며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발걸음을 떼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면, 우리도 마침내 '합의의 나라' 네덜란드 부럽지 않은 '합의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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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 피해 절감을 위해 조정한 비행항로-그림 왼편의 곡선 출발점이 5번 활주로 이륙지점. ⓒ네덜란드 인프라 환경부

/ 최경호 델프트공대 OTB인공환경연구소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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