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의 유럽르포'는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유럽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친밀감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미국 편향적인 모델을 지향해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우리 시민들도 이제 새로운 모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갑'의 양보는 어떻게 가능했나
<유럽르포22> ② 갈등이 없는 나라, 네덜란드?



중재기구 알더스타펠(Alderstafel)


스히폴 공항 5번 활주로 완공 이후에도 공항의 확장이나 운항 증편 등 이해관계에 있어 충돌이 벌어질 사안은 많았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소모적인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정책 기획단계에서부터 논의기구가 필요하다는 데에 모두 공감하였다. 이에 2010년까지의 단기 과제와 2020년까지의 중기과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2006년 알더스타펠(Alderstafel, 영어로 Alderstable)이라는 중재기구가 출범하였다.


알더스타펠(Alderstafel)은 전직 장관이자 흐로닝헌(Groningen) 주지사인 한스 알더스(Hans Alders)가 중재기구의 좌장을 맡으면서 그의 이름과 '타펠(책상)'을 합성한 것이다.(네덜란드에서는 이런 기구작명법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이 기구는 거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망라했다. 주민대표 단체(CROS), 스히폴 그룹, 스히폴 공항 운영위원회, 왕립네덜란드항공(KLM)뿐만 아니라 항공사에 취항하는 항공사 대표단, 인프라환경부(중앙부처), 43개의 기초지자체(Gemeente, 한국의 시·군청과 유사), LVNL(네덜란드 항공교통통제위원회)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알더스타펠을 통해 현재까지 도출된 협상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공항의 수용능력과 관련한 성능 개선에 착수했다. 스히폴 공항은 2020년까지 예상되는 58만 편의 항공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51만 편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제반 시설을 개선한 반면, 에인트호번(Eindhoven)과 랠리스타드(Lelystad)에 7만 편을 이관했다. 이를 위한 대책은 각 지역의 알더스타펠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공항의 위상 및 성격에 대해서 스히폴 공항은 중심 허브 공항의 지위를 강화하되, 다른 공항들은 레저·저가항공 등의 차별화를 통한 성장전략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라이언에어와 같은 저가항공은 스히폴 공항이 아닌 에인트호번 공항에서 취항한다.


또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공항 주변지역 지역발전기금으로 3000만 유로를 마련하고, 항로 및 활주로 체계 역시 지역친화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도록 새로운 관리 체계와 법체계를 도입하며, 주변지역을 보호하는 항공운항기법(항로 변경 및 연속하강접근법Continuous Descent Approach)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동원된 8가지 협의의 원칙이 있다.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알더스타펠의 협의의 원칙 (8항)>


△ 협상은 '주고받기'다.
△ 협상은 회의장 안에서 한다.  외부 기자회견을 통해 하지 않는다.
△ 참여자들은 최초의 총론, 즉 내각이 결정한 ‘스키폴의 확장’ 자체는 기본전제로 인정한다.
△ 참여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존중한다.
△ 참여자들이 공개에 합의하기 전까지는, 각종 문서를 포함한 모든 논의사항은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 참여자들은 협상에 대한 권한을 (각 조직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위임받았다.
△ 참여자들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 공보 관련 규칙 :  중재기구 좌장인 알더스(Mr. Alders)만 외부에 발언할 수 있다.

 

 

협의의 원칙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4항) 대화, 특히 협상의 상대자로서 신뢰를 구축하는데 꼭 필요한 점(2항·5항·8항)뿐만 아니라 진영 혹은 조직의 대표자로서 지켜야 할 점(7항)이 명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첫머리에 '주고 받기'의 생리를 받아들이라 명시한 점은, '원칙의 비타협적인 고수'를 통해서는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절충주의의 입장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각제와 전국단위 비례대표제의 결과, 대부분 '연립정부 구성'을 통해 정부를 운영해야 하는 네덜란드 상황에 비춰볼 때 연정 파트너 간 타협과 절충을 중시하는 정치문화와도 통한다.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 배경, 과연 외세와 자연 덕일까?


흔히, 네덜란드 합의문화의 배경은 “바다와 강물의 범람의 위협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 방조제를 만들어야 했고, 프랑스·영국·독일 등 강대국에 둘러 쌓여 외세의 위협을 받았기에 구성원들의 협력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공무원이나 시민,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합의의 비결은 합의죠, 될 때까지 결정을 안 하는 겁니다"라는 허탈한 대답을 했던 네덜란드 인프라 환경부의 공무원도 ‘그래도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을 것 아니냐’라고 재차 파고든 방문단의 질문에 위와 같은 답을 했다.


또한 팔루디와 팔크(Faludi&Valk), 볼텨르(Woltjer)같은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땅에 몰려있는 높은 네덜란드의 인구밀도 때문에 인프라·주택·산업·자연·휴양 및 농업 등 제반 국토계획에서 조심스럽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다고도 한다.(네덜란드의 합의정치, 참여제도, 공간계획 등에 대해서는 Lijphart, Healy, Faludi, Valk, Huys, Woltjer, Zwart의 저서나 논문을 참고)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이유일까. 합의의 본질은 누군가 혹은 서로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인데, 과연 자연과 외세라는 '공동체 외부의 위협'이 이런 양보의 필요충분조건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외세의 위협이라면 한국도 둘째가라면 서러웠고,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는 더더욱 심화됐으며, 심지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겪은 후에는 남과 북 모두 총동원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토론이나 합의는 사치에 가까웠다.
 
즉, 우리의 경우는 '외부의 위협'이 오히려 토론이나 협의를 생략 또는 금기시하고 오직 정부의 방침대로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됐다. 네덜란드 인구의 20%가 해수면 아래에 50%가 해수면으로부터 1m 이하에 살며 자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북한의 장사정포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적인 위협이냐 사회적인 위협이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외부의 위협, 즉 주변 열강들의 존재나 높은 인구밀도 등은 네덜란드와 똑같은 조건이다. 그런데 왜 네덜란드에서는 '외부의 위협'이 '토론과 양보와 합의의 바탕'이 되었는데, 왜 우리에게 토론이나 협의, 양보나 합의는 '사치'가 된 걸까. 


한편, 제도적 측면에서 합의문화에 바탕을 둔 네덜란드의 정치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는 다당제이며, 전국단위 비례대표제와 상하원 제도를 통해 입법부가 구성된다. 또 연립정부 수립을 통한 정치적 학습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제도를 기반으로, 다양한 정견이 거리가 아니라 탁자 위에서 또 제도권 내에서 논의되며 타협과 절충의 정치문화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입헌군주제는 1850년대부터 시작됐으니, 그렇게 긴 역사를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직후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세계사적 격변기에도 노동 운동이나 주거권 운동 등에 있어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가 과연 최초의 합의문화나 양보정신의 '원인'인지, 아니면 그 반대에 따른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규명이 어렵다.  


그렇다면 합의문화 형성의 보다 직접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합의의 배경에 기득권층의 양보가 있었다면, 이는 혹시 '수틀리면 떠나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도전정신(?)과, 이들이 쉽게 떠날 수 있는 지리적 요인이 배경이 된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기득권층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보는 것이다. 즉, '을'의 기동성이 '갑'의 양보 배경은 아닐까? 


호르스트(Han van der Horst)는 <낮은 하늘(The Low Sky)>이라는 책에서 네덜란드인의 성격을 △평등주의 △실용주의 △조직성 △무역(교환) 지향 △사생활 보장 △명예 중시의 6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데, 평등주의의 항목에서 '잦은 인구이동'을 기득권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3대 강인 ‘라인, 마스, 스헬트(Rhine, Scheldt, Maas)’가 만나는 하구 지역은 지형의 변화가 잦아 토지에 기반을 둔 지역 영주들의 세력이 불안정했다. 실제로 현재 로테르담 시를 거쳐 북해로 빠져나가는 라인 강은, 로마시대에는 현재 위치로부터 30km가량 북쪽에 있는 레이던 지역에서 바다와 만나 삼각주를 형성했다. 


중앙의 황제나 왕의 지배력 역시 로마시대나 프랑스왕조 때에는 그 영향이 지역의 말단까지 미치지 못했다. 특히 강 하구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시 역시 같이 발달했는데, 이는 농민과 달리 이동이 자유롭고 재력을 갖춘 상인 집단의 세력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 상인들이 내는 세금이 필요했던 영주들은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했다.

 

 

1.jpg
▲ 로마시대(왼쪽)와 중세(오른쪽)의 네덜란드 라인, 마스, 스헬트 강 삼각주 유역의 변화. 왼쪽그림에서

브리텐뷔르흐(Brittenburg)로 나가던 라인 강의 본류는 중세를 거치며 방향을 바꾸었다. 현재 레이던

(Leiden)의 '옛 라인(oude Rijn)'이라는 작은 지류로, 그 흔적만 유지하고 있다. ⓒ 저자 미상(1913)

 Tramplers Geographischer Mittelschulatlas, 8th Ed., Wien (Austria), http://en.wikipedia.org/wiki/File:North_Holland_1st-10th_Century.jpg에서 재인용)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의 합의문화의 결정적인 배경이 '잦은 인구 이동'과 이에 따른 ‘영주의 세력 불안정' 그리고 '기득권층의 양보'라는 결론이 다소 허탈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수요와 공급에 따라 아쉬운 쪽에서 양보한다'는 논리에 맞추어 인구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갑'들이 양보를 하고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 최경호 델프트공대 OTB인공환경연구소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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