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자유주의, 복지국가, 조정시장경제, 합의제 민주주의 등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에 필요한 대안담론들을 제시하고, 그 구현 방안들을 논의하고 도출해내는 열린 토론의 장입니다.

[제5회 대안담론포럼 - 제2의 민주화운동: 합의제 민주주의를 향하여]

 

 

누가 어떻게 정치를 하나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1. 제도적 이성과 정치적 이성 사이에서

 

  본 발표자가 합의제 민주주의 이론과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지역적 대표체제’(정당체제)와 ‘기능적 대표체제’(노사관계를 핵심으로 한 이익대표체제)를 사회적 갈등 구조 위에서 얼마나 폭넓은 기반을 갖도록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냐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발표자의 입장에서 그 핵심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혹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본다. 발표자가 이를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들 사이에는 일정한 가치 합의가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에 적시되어 있는 자유, 평등, 생명, 행복추구 등과 같은 기본 규범이 대표적이다. 즉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어느 민주주의 국가나 그러한 가치 합의 내지 기본 규범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나라마다 성취한 민주주의의 사회적 결과는 다 다르다. 미국의 민주주의 다르고 독일의 민주주의 다르며 일본과 프랑스, 영국, 북유럽의 민주주의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어떤 특징을 가진 나라가 평등할까. 즉 빈곤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고. 여성 장관 비율은 높고,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어떤 나라가 자유로울까. 인권 및 자유화 지표가 좋고, 투표율도 높고,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부여 정도가 높을까. 어떤 특징을 가진 나라가 건강할까. 기대 수명은 높고, 불법 약물복용·10대 임신·10대 자살·저체중아 출산율·정신질환 발병률·영양실조·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어떤 나라가 평화롭고 안전할까. 폭력·살인·강간 등 강력 범죄율은 낮고, 여행과 통행이 어려운 범죄 공간이 많지 않고, 재소자 비율도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그간 이루어진 다양한 방식의 조사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보정당이 있고 그들의 영향력이 큰 유형의 나라들(집권 기간이 길거나 득표력이 큰 유형), 그리고 노동조합의 조직적 힘이 큰 유형의 나라들(노조조직률이 높거나, 단체협상적용 범위가 넓거나, 산별노조나 정상노조의 영향력이 큰 유형)이 그렇지 않은 유형의 나라들보다 지표가 좋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성했는데, 그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현실에서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하고 오히려 노동의 시민권이 강한 나라, 혹은 진보적인 정당들이 보수적인 정당들과 겨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높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념과 계층을 하는 정치적·기능적 대표의 체제가 그 사회의 갈등 구조에 상응하면 할수록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이 좋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발표자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혹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도 그와 같은 정치, 사회적 조건을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집약해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 온건 다당제, 비례대표 민주주의(Proporz Democracy), 노사가 참여하는 조정형 시장경제를 말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론과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천론 혹은 이행론의 차원이다. 즉 합의제 민주주의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현재와 같은 협애한 이념적·계층적 대표체제 위에서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양당제적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전환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발표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진보정당과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로 전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행론 내지 실천적 처방론과 관련해 발표자의 입장은 여러 형태의 글을 통해 밝혔듯이, 민주주의 관련된 고전적 이론의 하나인 ‘외생정당론’에 있고 그 핵심은 ‘종류가 다른 정당의 충격’을 중심으로 문제를 보는 데 있다. 주관적 선의보다 객관적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구식 정치학자’로서 발표자는 늘,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핵심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어떤 물리학적 힘의 배열구조를 갖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가능케 하는 정치적 변화가 사회·경제·문화의 영역으로 연쇄적 변화를 확장해 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론이 어떤 이행론 내지 실천론을 갖는지에 대해 발표자가 특별히 알고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발표자에 비해 제도적 접근 내지 제도적 이성을 훨씬 더 중시하는 것 같다는 인상은 갖고 있다. 제도의 문제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제도 문제와 관련해 발표자의 입장은 합의제 민주주의론과 약간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느낌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발표자 역시 다당제와 비례대표제, 코포라티즘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당체제에 있어서) 양당제보다는 다당제가, (선거제도에 있어서) 단순다수제보다는 비례대표제가, (정부형태에 있어서) 대통령중심제보다는 의회중심제가, (이익매개체제에 있어서) 다원주의보다는 코포라티즘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두 유형의 제도들은 단지 장점과 단점을 나눠가질 뿐이며 따라서 조건에 따라 어느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제도 혹은 그 조합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고 보는 편이다. 또한 제도적 접근을 중시하면서 파당적 차이(partisanship)가 주는 제약 효과를 경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파당적 차이를 절대 넘을 수 없는 제약으로 보고 접근하는 것도 잘못이겠지만, 그렇다고 엘리트들 사이의 협력체제(elite accommodation)나 권력 공유(power sharing) 내지 합의 문화 등의 차원이 파당적인 것을 초월해 실현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본다. 제도 변화의 인과적 효과 역시 현실에서는 다양한 매개 변인들 속에서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고, 제도 변화는 곧 기구와 예산의 형태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관료제적 범위 안에서 통제될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제도 변화와 관련해 발표자의 생각을 말하라면 그것은, 지오바니 사르토리와 후안 린츠 사이의 논쟁에서 사르토리 입장에 가깝다. 즉 제도가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제도를 만드는 문제에 더 강한 관점을 두는 것에 있다. 린츠는 의회중심제로의 전환을 강조하면서 그래야 정당도 발전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사르토리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외생적 충격 없이 대중정당이 발전한 단 하나의 사례도 자신은 알지 못한다며 “남비 속의 물이 뜨겁다고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요컨대 발표자 역시 넓은 범위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론자로 분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체제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도 변화를 접근하는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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