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자유주의, 복지국가, 조정시장경제, 합의제 민주주의 등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에 필요한 대안담론들을 제시하고, 그 구현 방안들을 논의하고 도출해내는 열린 토론의 장입니다.

[제2회 대안담론포럼 -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

 

 

진보적 자유주의, 사민주의 그리고 케인스

 

고 세 훈(고려대학교)

 

1. 개념과 딜레마

 

시장실패가 현실적으로 드러난 이후 (예컨대 존 밀을 기점으로) 자유주의에 진보-사회적, 신(new) 등-의 수사는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진보도 자유주의도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명확히 합의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라는 수식어를 자유주의에 첨가함으로써 자유주의는 일종의 포괄(catch-all, encompassing, umbrella) 개념 혹은 이념으로 되었고, 그럴수록 현실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실천력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것이 점차 더 어려워졌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존 홉슨 스스로도 “자유주의의 무한적 성격”(an illimitable character of liberalism)을 언급한바 있지만, 어쩌면 자유주의는 처음부터 팽창지향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만약 자유주의가 견제되지 않은 시장을 위험하게 인식하고, 공공의 이익이 사적 이해에 앞서며, 일반이익을 보호하고 사회적 유대를 고양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질서를 포괄하는 것으로 개념이 확대된다면, 그 개념은 너무 탄력적이어서 거의 쓸모가 없게 된다.”


예컨대 자유주의는 만인평등, 기회균등, 언론과 결사의 자유, 인권을 말하고 진보적 자유주의는 거기에 더하여 시장실패, 정부개입의 정당성, 상생 등을 주창한다. 그러나 오늘날 웬만한 양식을 가진 사람 치고 이런 가치들에 반대할 이 별로 없을 것이다. 실은 이런 것들은 사민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동의하는 가치들이다.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자유와 평등을 궁극적 목표로서 제시하지 않은 이론가, 실천가들이 과연 있었던가. 개념의 내포가 풍부해 질수록 분류, 범주화의 분석적 의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후자가 다시 사회주의를 포괄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선한 것들을 그 안에 집합시킨다면, 담론 수준에선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담론은-‘제3의 길’류의 담론들이 그렇듯-실천성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가장 신실한 말이 가장 허망한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정치는 가치와 정책을 둘러싼 엄정한 선택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진술은, 그것이 대안적 지위를 획득하려면, 실천과 정책적 함의를 위한 안내, 지침 혹은 방법론을 일정하게 담아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a kinder, gentler capitalism")를 주창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대안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대안을 위한 수많은 논의들이 종종 풍성한 말잔치로 끝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너무 멀리 나가면서 자유주의가 내적 모순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변해가는 것은 우선 논리적으로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때 그 자유주의에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그리고 또 역사(경험, 현실)적으로도-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주체)의 재산권행사의 자유(내용)에 있다. 재산권의 문제야말로 나머지 모든 기본권과 자유의 현실적 구현 가능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가창출 이후에는 재산소유자 이외의 두 당사자, 곧 조세를 징수하는 국가와 (재산이 생산수단으로 고용되면서) 생산수단의 완전한 활용을 위해 요구되는 (생존을 위해 타인의 재산에 의존해야 하는) 노동이 등장한다. 개인의 재산권은 이 둘의 권리와 충돌하며, 특히 노동계급의 자유는 재산소유자들이 정한 우선순위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재산권과 보편적 자유개념의 충돌을 피하려면, 재산권 이외의 기본권적 자유가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존 밀이나 이사야 벌린 등 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들은 소극적 자유에 절대적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가 이론적 난점을 아무리 첨예하게 인식했다 할지라도, 소극적 자유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 자유가 필수적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소극적 자유와 사유재산을 연결시키는 주장의 핵심에는 행위자(재산소유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구상과 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물적 능력이 있다는 무언의 가정이 있다. 즉 사유재산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소지한 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이나 구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재산권행사에 초점을 맞춘 소극적 자유 개념에는 적극적 자유개념의 본질적 요소, 곧 행동을 위한 충분한 물적 재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는 것이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에 옮길 수 있는 충분한 물적 자원을 가질 수 있는 자연상태에서는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는 수렴하며, 소극적 자유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재산관계가 계약에 따른 국가창출을 통해 고정된 법적 지위를 얻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 오로지 재산소유자들만이 자유행위를 위한 물적 자원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게 되고, 무산자들은 그러한 자원을 결여한 채, 자유행위의 가능성을 봉쇄당한다. 두 차원의 자유 모두에서 비대칭적 관계가 뒤따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대칭은 소극적 자유가 ‘원칙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행동의 영역은 보편적 기본권행사가 중지되는 중립적 영역이 아니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의존관계를 증대시키고, 그 결과 개인의 사적, 사회적, 정치적 자율성을 훼손하지만, 양 진영이 형식적으로 동등하게 취급된 데서 오는 사실상의 불평등(de facto inequality)은 종종 부차적인 것으로만 간주된다. 그리하여 문제는 자유 자체의 문제이지만, 자유와는 별도의 범주로 취급되는 정의의 문제로 손쉽게 돌려진다.


자유주의는 이런 내적 모순을 완화 혹은 해소하기 위해 일정한 변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과 담론 수준에서 이런 딜레마가 인식되고 규범적 처방-예컨대, 국가개입, 복지국가, 규제강화 등-이 제시됐다 해서, 그것이 곧바로 진보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에드워드 왕조와 전간 시절의 대표적인 진보적 자유주의자였던 존 홉슨의 경우를 보자. 그는 맨체스터 자유주의학파의 콥덴주의자에서 출발하여, 자본과 노동의 과소고용은 과도한 저축 때문이라는 과소소비론을 주창했다. 정통경제이론(세이의 법칙)에 대한 그의 비판에 따르면, 고전정치경제학은 절약이 미덕이라는 논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절약, 검약, 저축이라는 미덕이 오히려 만연하던 산업적 질환의 주된 이유였다. 그에 따르면, 생산을 제약하는 것이 소비이지, 생산이 소비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며, 과세는 지출 아닌 저축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수행돼야 한다. 또한 홉슨은 빈곤을 사회적 문제로 규정하고, 국가적, 산업적 치유를 요하는 국가적, 산업적 질병으로 간주했다. 소비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그의 저작들은 자유방임에 대한 공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분석의 ‘논리적’ 일관성이 그 자체가 경험적 통찰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대안으로 곧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아가서 과연 빈곤과 실업과 같은 시장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국가개입을 막무가내로 부인할 자유주의자가 오늘날 몇이나 될까. 이론적 인식의 투철함 자체는 진보를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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