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 개소(2010년 3월 1일) 이후의 칼럼 및 인터뷰 모음입니다.

30년 만에 배달된 선물

 

 

 “한 잔 더 하시죠.” 방금 한 잔 했는데 또 재촉이다. 그는 이미 혀가 약간 꼬부라져 있었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마셔요, 술 마시는 기분 나지 않아요?”

 
 요즘 뉴스를 보는 일이 즐겁다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가 흥을 돋운다고 한다. 뉴스에는 대통령이 참모들과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초등학생이 사인 받을 종이를 찾느라 가방을 뒤적이는 동안 키를 낮춰 기다려주는 대통령도, 5·18 때 아버지를 잃은 시민을 안고 위로해주는 대통령도 볼 수 있다.


 이런 일에도 시민들은 감동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말했듯이 “뭔가 특별한 일을 해서가” 아니다. 세월호·광주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도 무표정한 지도자, 비정규직을 숫자로는 이해해도 결코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지도자 대신 시민의 고통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사람에게 쉬운 일은 로봇에게 어렵고, 로봇에게 쉬운 일은 사람에게 어렵다.’ 모라벡의 역설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밥 먹고 말하고 걷고 커피 마시는 것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로봇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반면 복잡한 계산은 로봇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에겐 어렵다. 보통 사람은 절대 못하는, 정치 공학적 계산에는 능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고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로봇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고 하자. 대통령이 그토록 쉬운 걸 왜 못하는지 사람은 절대 이해 못한다. 이렇게 속아서였을까. 5월9일까지만 해도 차선의 선택이라도 한 것인지 불안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시민은 자신의 손으로 뽑고도 놀란다.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처럼 생각하고 우리처럼 느끼는 정부를 선출했다니!

 

 새 정부가 정말 적폐를 청산할지, 개혁에 성공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겨우 새 정부 출범 14일째다. 연합정부 없이 ‘여·야·정 협의체’만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다.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새 정부가 시민을 대하는 자세, 정부를 책임질 인물을 고르는 감각, 현안을 다루는 방식만 보고 있으면 불안감이 사라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기를 의식한 것도 있겠지만, 그걸로 시민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가슴 태우던 세월, 절망스럽고 부끄러운 시간을 견뎌내느라 지친 시민, 낡은 권력에 시달린 시민을 위로하는 퍼포먼스가 당분간 필요하다.


 새 정부는 앞으로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 건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묻지마 지지와 반대를 위한 반대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칭찬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비판하면 된다. 그게 공정한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그래야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부추긴다. 다행히 대선 이후 이념·지역에 결박된 지지와 반대가 약화됐다. 시민들은 이념·지역이 아닌 당면한 의제와 현안에 대한 각 정당의 입장과 태도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그게 시민의 요구에 반응할 줄 아는 민주당·정의당 지지율은 오르고 세상 물정 모르고 역주행하는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폭락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TK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85%에 이르고, 민주당 지지율이 한국당을 앞선 이유도 알려준다. 한국당의 전국 지지율은 8%, 국회 의석수는 36%. 과잉대표다. 한국당은 이제 시민이 준 지지보다 4.5배나 큰 몸집을 지닌, 덩칫값 못하는 공룡이 됐다. 이것 역시 시민들이 반응성 있는 정치를 한 결과다.


 예전의 한국인을 정의한다면, ‘정치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상처 때문에 정치를 혐오했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정치의 힘 때문에 정치를 욕망했다. 정치에 대한 이런 혐오와 집착은 한국 정치를 병들게 했고 시민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정치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시민은 더 이상 정치 밖에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정치 참여의 마당이 된 것도 정치에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정치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낸 결과였다.


 이제 정치는 시민을 위로하고 치유해주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치유된 시민은 더 많은 정치 참여를 할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정치, 더 나은 삶도 가능할 것이다. 이게 바로 민주화 30년 만에 뒤늦게 배달된 선물이다.


 다시 어려움이 닥쳐도 시민은 극복할 수 있다. 동료 시민을 믿자. 내일 또 행진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건배하자. 낡은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 정부를 세운 시민은 그럴 자격이 있다.


/ 이대근 논설주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조회 수 날짜
2883 성한용, "바른정당 보수혁명 성공해야 한다" (한겨레 2017.06.26) 131 2017-06-28
2882 이일영, "글로벌 네트워크와 한반도 정세" (경향신문 2017.06.21) 133 2017-06-28
2881 정태인, "트럼프 대통령께"(경향신문 2017.06.26) 137 2017-06-28
2880 이대근, "문재인 정부는 왜 흔들렸나?"(경향신문 2017.06.20) 184 2017-06-21
2879 조홍식, "마크롱 혁명 "정치 안 바뀌면 미래 없다""(조선일보 2017.06.14) 174 2017-06-19
2878 이대근,"트럼프가 거부할 수 없는 터프한 제안을!"(경향신문 2017.06.14) 185 2017-06-19
2877 성한용, "야당 손을 꼭 잡아야 개혁할 수 있다" (한겨레 2017.06.05) 187 2017-06-09
2876 정태인, "북핵 문제 해결의 입구로 들어가려면" (시사IN 2017.05.24) 228 2017-05-29
» 이대근, "30년 만에 배달된 선물" (경향신문 2017.05.24) 207 2017-05-29
2874 이일영, "촛불연합이 개혁의 동력이다" (경향신문 2017.05.17) 252 2017-05-23
2873 이대근, "[이대근의 단언컨대] 143회 한국당의 ‘문재인 정부 실패 프로젝트’" (경향신문 2017.05.17) 248 2017-05-23
2872 성한용, "막강한 장관, 강력한 내각 기대한다"(한겨레 2017.05.15) 287 2017-05-16
2871 이대근, "문재인 대통령의 첫날에" (경향신문 2017.05.11) 291 2017-05-16
2870 구갑우, "일상의 위기론, 언제까지 끌고 갈 건가"(프레시안 2017.04.26) 495 2017-05-04
2869 이대근, "트럼프의 참을성에 건배!" (경향신문 2017.05.02) 392 2017-05-04
2868 성한용, "5·9 대선 ‘승자의 저주’ 안 걸리려면" (한겨레 2017.04.24) 423 2017-04-25
2867 조홍식,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서 대선 치르는 프랑스…‘견제와 경고’ 나선 유럽"(경향신문 2017.04.13) 471 2017-04-20
2866 선학태, "소수파 대통령의 협치" (한겨레 2017.04.13) 473 2017-04-14
2865 이일영, "4차 산업혁명 협치하라" (경향신문 2017. 04.12) 500 2017-04-14
2864 김상조(인터뷰), "삼성·현대차·SK·LG 집중 개혁 왜?..." (이데일리 2017.04.14) imagefile 522 2017-04-1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