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제1회 대안담론 포럼 (2010년 6월 11일)
제 3세션 발제문 녹취
발제자: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한국형 조정 시장 경제와 합의제 민주주의 :
진보적 자유주의 구현을 위한 제도적 해법

1. 들어가는 말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혹은 정치적 평등과 사회적 평등이 보장될 때 각 개인이 진정한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여기서는 이 진보적 자유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해법이 무엇인지를 한국적 맥락에서 논의하려고 합니다. 우선 정치적 자유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정치적 결정과정에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가져야 스스로 자유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제의 정치'(politics of exclusion)가 아닌 '포괄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가 보다 더 잘 작동되는 민주주의 제도를 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주주의를 승자독식형 '다수제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 유형에 대비되는 권력공유형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 유형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회적 자유는 정부나 시민사회의 적극적 시장개입이 인정되고 제도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사회경제적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빈곤과 격차 그리고 실업 등의 공포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본주의를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체제에 대비되는 '조정 시장 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 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자유시장경제와 조정 시장 경제, 그리고 다수제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유형 개념은 명목척도(nominal scale)에 의해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개념이 아니라 오직 순서척도(ordinal scale)에 의해 구분되는 것일 뿐이란 점입니다. 그것은 좌파나 우파 혹은 진보나 보수의 구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개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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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로의 발전이 필요하다

1) 자본주의의 다양성

생산레짐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다양성(VOC) 논의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는 크게 자유시장경제와 조정 시장 경제의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은 전자에 속하며, 북유럽국가들과 독일 그리고 일본 등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 국가들입니다. 조정 시장 경제에서는 노사관계나 숙련형성 및 고용체계 등 제반 생산레짐 요소의 작동에 대하여 정부나 사회의 조정 혹은 개입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자유시장경제에서는 모든 작동이 기본적으로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이루어집니다.

조정 시장 경제는 다시 국가주도 조정 시장 경제와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발전주의형 조정 시장 경제'라고도 부르는데, 전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과 민주화 이전의 한국경제가 그 전형입니다. 후자인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의 모범사례는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시장의 조정이 주로 '노사정 3자협약의 정치경제'라 불리는 '사회적 합의주의'(social corporatism, 이하 '사회합의주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이던 80년대 말 90년대 초 무렵 자본주의 수렴론이 운위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계화로 인해 각국의 자본주의가 결국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수렴될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세계화시대에도 각기 자신들 고유의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 체제를 발전시켜갔습니다. 즉, 자본주의의 다양성(VOC)이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이후에는 뉴질랜드, 영국과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우방들 사이에서, 그리고 오바마 정부 하의 미국에서도 신자유주의의 퇴조경향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2) 한국형 조정 시장 경제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요소의 도입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거쳐 조심스럽기는 했으나 점진적으로 줄곧 확대돼 갔습니다. 현 이명박 정부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감수하며,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의 심화나 비정규직의 증대 등 신자유주의 확대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가 이미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이 극도의 경제적 자유주의 편향 상황 하에서 재벌 등 대자본의 힘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해지고 있으며, 일반시민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사회적 자유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위협에 노출돼있습니다. 이를 방치해둘 수는 없으며, 이제는 분배친화적 자본주의 모델을 마련할 때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자본주의 모델을 채택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는 아직 그리 깊숙이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원칙들은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한국 자본주의의 유형은 조정 시장 경제체제여야 하며, 둘째, 한국형 시장경제는 무엇보다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체제여야 하고, 셋째, 한국의 기존 생산레짐 여건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시장경제 체제로 설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품생산체계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산업구조는 금융 등의 서비스산업과 일부 첨단산업에서만 우위를 보이는 영미형보다는, 전통 제조업과 IT등의 첨단제조업 분야에서 고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북유럽 강소국 유형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은 조정 시장 경제 상품생산체계의 전형인 고숙련 생산체계 하의 '고품질 특화 상품'(diversified quality product, DQP) 생산이 중심이 되는 경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합당한 고용체계나 노사관계가 무엇일지는 자명합니다. 기업 입장에서 볼지라도 단기보다는 장기 고용체계가, 그리고 분쟁적이기보다는 협력적 노사관계가 기업 또는 산업의 특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노동의 안정적 확보에 적합합니다. 여기서 장기고용체계나 협력적 노사관계가 조정 시장 경제의 전형에 속하는 생산레짐 요소들임은 자명합니다.

금융체계 및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도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포함한 기업 및 산업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요구하는 자유시장경제식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로의 이행은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해관계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성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감이 바람직합니다.

네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원칙은, '세계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조정 시장 경제 체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화에 따른 일정 정도의 산업 혹은 기업 구조조정은 불가피합니다. 혁신이 용이하지 않은 경제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혁신친화적일 수 있는 조정 시장 경제 체제 구축이 절실해집니다. 이는 결국 복지자본주의를 지향하게 합니다. 잘 갖추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 기제로서 기능함으로써 개방경제 하의 산업 및 기업 구조조정을 순조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이론과 경험에 의해 공히 증명된 사실입니다. 결국 한국의 시장경제체제는 복지주의 조정 시장 경제체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원칙들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가치는 '사회공동체와 연대'라는 점에 주목해야합니다. 사회공동체와 연대의 가치가 존중되고 보장되는 자본주의야말로 모든 시민들의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자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실현은 시장이 사회 구성원들 간의 협의나 합의에 의해 조율되고 조정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분배와 생산성 간 혹은 형평성과 효율성 간의 균형점, 그리고 복지의 양과 질의 적정선 등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직접 협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다만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한국적 상황에서 작동 가능한 사회적 협의나 합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보편적 해법은 유럽의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 국가들처럼 사회합의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사실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의 핵심 기제는 사회합의주의입니다. 사회합의주의는 주요 이익집단들을 사회경제 정책의 수립과 집행과정에 참여케 함으로써 사회적 불만과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시장 조정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사회경제 거버넌스입니다. 그러나 과거 서유럽을 풍미했던 고전적 사회합의주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이 '경쟁력 사회합의주의'(competitive corporatism)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합의주의 거버넌스를 구축했듯이, 한국도 자기 지형에 들어맞는 자기 고유의 새로운 사회합의주의를 만들어내면 됩니다.

그런데 한국형 사회합의주의를 제도화하여 그것을 근간으로 하는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를 발전시켜가겠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여 집단들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이 보장돼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협의나 합의의 장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만약 사회적 합의 과정이나 이후 그 합의내용에 관하여 벌어지는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노동의 의견이 무시되기 일쑤라면 노동은 더 이상 그러한 거버넌스 운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합의주의는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정부는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을 '특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자본이나 대기업 등의 강자 집단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를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요? 한국형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의 발전 문제는 결국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3.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발전이 더 급하다

1) 다수제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5대 특성

레이파트(Lijphart, 1999)의 분류법에 의하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그 제도 디자인의 내용에 따라 크게 다수제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두 유형으로 나뉘어 발전해왔습니다. 이 둘은 5대 특성을 통해 명확히 식별할 수 있습니다. 5대 특성 중 첫째는 선거제도에서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다수제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와 같은 다수대표제 혹은 다수결형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데, 이는 2위 이하의 후보들에게 던져진 표는 모두 사표(死票)로 처리되는 철저한 승자독식 선거제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 간에 '비례성'(proportionality)이 전혀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를 채택합니다. 이를 통해 크든 작든 모든 정당은 각자 지지 받은 만큼 자기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특성은 정당체계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선거제도와 연계돼 있습니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의 발전을 유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결국 다수제민주주의에서는 양당제,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다당제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성인 행정부의 형태도 선거제도 및 정당체계와 연관돼 있습니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로 양당제를 유지하는 다수제민주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행정부 형태는 단일다수당정부이고,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연립정부 형태입니다. 네 번째 특성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힘의 분배 양상입니다. 다수제민주주의의 경우 통상 단일다수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행정부도 구성하는 행정부 우위제가 일반적이고,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의회와 행정부가 힘의 균형을 도모합니다. 마지막인 다섯 번째 특성은 이익집단대표체계에 관련된 것입니다. 다수제민주주의에서는 다원주의적, 경쟁적 이익집단대표체계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한편,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사회합의주의적 이익집단대표체제가 발전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2) 합의제 민주주의의 포괄성과 조정 시장 경제 촉진 효과

이렇게 민주주의를 두 유형으로 분류했을 때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포괄성입니다. 앞서 이근식 교수님께서도 정치적 자유는 개념 그대로 '포괄의 정치'가 발달한 곳에서 더 잘 지켜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두 유형 분류에 따르자면, 원칙적으로 다수제민주주의는 배제의 정치, 합의제 민주주의는 포괄의 정치를 바탕으로 하여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수제민주주의 경우 승자독식 모델이 작동되고,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차지합니다. 이때는 승자가 자신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패자 세력에 대한 배려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결국 정권교체기마다 정치과정에서의 배제 세력은 양산되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됩니다. 포괄의 정치가 작동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정치권력이 분산되고, 따라서 정치과정은 양보와 타협에 의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약자나 소수자 그리고 저항 혹은 거부세력에 대한 포용이 일상의 정치문화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런데 포괄의 정치를 본질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핵심 기제는 비례대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대변하는 다수의 정책 및 이념 정당들이 선거제도의 비례성 덕분에 의회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례대표제는 그 성질상 대부분의 경우 다당제와 연립정부 형태로 이어집니다. 이 정치제도 패키지, 즉 비례대표제, 다당제, 연립정부 등에 의해 협의주의(consociationalism) 정치가 가동되며, 이것은 사회합의주의 거버넌스와 맞물려 가게 됩니다. 결국 합의제 민주주의는 비례대표제를 시작으로 하여 상호 맞물려 있는 포괄성 혹은 포용성 높은 정치제도 및 그것들과 친화성을 유지하는 사회경제 제도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는 다수제민주주의보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포괄의 정치가 제도화 되어 있는 합의제 민주주의에서 더욱 잘 보장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포괄의 정치에 의해서 더 잘 보장될 수 있다면, 사회적 시민의 자유 역시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포괄의 정치에 의해 더 잘 보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합의제 민주주의의 이 포괄성은 조정 시장 경제와의 친화성으로도 이어지는데, 이는 사회합의주의가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 거버넌스이기 때문입니다.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 시장 경제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사회합의주의가 양 체제를 친화성의 관계로 이어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합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 간에는 친화성을 넘어 일정 정도의 인과성까지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포괄성이 높은 정치 제도의 패키지들이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를 추동한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가 발달하기 좋은 정치제도적 조건을 합의제 민주주의가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핵심 고리는 사회합의주의에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사회합의주 의를 근간으로 하는 조정 시장 경제가 발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역시 정당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회합의체의 참여자들 간에 동등한 파트너십이 유지되도록 해주는 것은 (비례대표제가 촉진하는) 정책과 이념 중심의 소위 '구조화된' 다정당 체계입니다. 그것이 연립정부로 이어지는 연계관계 하에서 사회합의주의가 잘 가동될 수 있고, 나아가 조정 시장 경제도 잘 가동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이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로의 제도 조건을 구성해 주므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대안체제로서 한국형 합의제 조정 시장 경제를 구축해가고자 한다면 그 조건으로서 먼저 급한 것이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나가는 말

최 근에 다시 권력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혁문제가 국가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잘만 하면 합의제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제도 요건들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을 한 가지만 강조하자면,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 연정형 권력구조가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으로의 전환을 무조건 찬성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아직 정당의 구조화가 안 된 상태이며, 여전히 정책과 이념이 아닌 인물과 지역이 중심이 되는 다당제 하에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비구조화된 다정당 체계에서 권력구조만 연정형태로 간다면 그것은 개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런 경우라면, 예컨대, 군소 지역정당들이라도 지역 지지기반을 잘 관리하여 필요최소한의 의원 수만 확보할 수 있다면 심지어 연립정부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역) 명망가나 소지역 중심의 지역할거주의가 오히려 더욱 창궐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지역정당들 혹은 그 보스들 간의 정권 나눠먹기 양상으로 발전할 것이고, 이는 곧 과두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내각제의 장점인 타협과 합의의 정치가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보스의 사적 필요성이나 '지역 이기주의적 요구에 타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장점이 재현될 가능성이 없는 개악에 해당될 것입니다.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은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순서는 지켜져야 합니다.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해서 정당의 구조화를 먼저 이룬 후에 권력구조로 가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둘을 병행해서 한 패키지로 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구조가 분권형으로 갈 때 그것과 동시에 비례대표제 혹은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로 같이 개혁하겠다면 찬성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권력구조만 바꾸겠다면 이는 반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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