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제 민주주의가 만능인가?

[박동천 칼럼] 최태욱 교수의 의문에 대한 답변

 

 

최태욱 교수의 의문에 대한 답변

 

내 책에 대해서 최태욱 교수가 서평을 쓰리라는 얘기를 <프레시안> 측으로부터 듣고 그동안 조마조마했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강 자유주의 좌파 (나는 내가 우파로 분류되어도 무방한 세상을 죽기 전에 만나고 싶다)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와 그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그가 주장해 온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나로서 적극 동조할 수는 없는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태욱 교수는 내가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에서 "정치개혁"에 관해 좀 더 적극적인 구상을 내놓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덕담을 잠시 곁들인다. 최태욱 교수가 내 글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는 대목들은 저자의 입장에서 좀 황송스러울 정도다. 단번에 봤을 때 "실망"스럽게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자가 "친절한 형태로 제시하지 않"은 구석들을 조목조목 재구성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인지 남을 괴롭히는 무기인지가 갈수록 분간이 잘 안 되고 있는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 서로 면식이 없는 상대가 쓴 글에 저만큼의 정성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가능성보다도 훨씬 강하고 묵직한 희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예절은 이 정도로 접고 쟁점을 후벼 파자면, 그의 의문은 결국 "왜 합의제 민주주의와 같은 대안을 주장하는 대열에 동참하지 않느냐?"로 집약될 수 있는 것 같다. 교조주의적인 인상을 피하기 위해 그가 좀 더 완곡한 태도를 취한다면, "합의제 민주주의는 반드시 아니더라도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 대안이 빠져 있으니 얘기가 좀 싱겁지 않느냐?"는 형태의 심문을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따옴표에 넣어 표시한 질문들은 논의를 압축하기 위한 방편일 뿐, 최태욱 교수의 내심에서 그런 형태의 질문이 실제로 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건드리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답변은, 그의 비평을 읽고 나서 내가 느끼기에, 그와 나 사이를 가로 지르는 차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관해 내 입장을 밝히는 형태일 따름임을 명확히 해두고 싶다.

 

우선 "합의제 민주주의"부터 살펴보자. 편의상 이를 그의 강한 주장이라고 부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전형적으로 비례대표제, 정책과 이념 중심의 온건 다당제, 책임내각제 등의 정치제도로 운영되는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 혹은 승자독식 민주주의에 비해 사회경제적 약자의 보호와 배려에 더 뛰어나다. 전체로서 다수를 구성하는 여러 약자 집단들의 정치적 참여가 더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이다." 최태욱 교수가 이런 주장을 펼쳐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지만,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천적으로도 흔쾌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는 전반적으로 아직 한국사회에서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정치에 관해 다양한 주장들이 펼쳐지도록 고무할 필요가 있다고 봐서 굳이 찾아가서 비판하기까지 나서지는 않았다. 이제는 차이가 본격적으로 불거졌으니 논쟁을 피할 수만은 없는 시점이 되었다.

 

논의를 위해 먼저 한 가지 구분이 좀 필요하다.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을 최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의 정치적 구호로 부르짖는 것인지 아니면 액면 그대로 보다 나은 정치체제의 설계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나눠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설계도라고 생각해서 주장하는 것이라면,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크게 잘못이라고 밖에는 판정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란 라이파트(Lijphart)와 같은 정치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영미식 제도에 대비해서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지의 정치체제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이런 나라들에 지역, 언어, 종교, 계급, 인종, 성별, 등등, 분열 또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은데도, 영미식 체제에 비해서 이런 나라들의 정치가 덜 폭력적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명칭은 맥락을 무시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상당한 혼동의 원인이 된다. 여러 가지 혼동을 지적할 수 있지만 쟁점을 축약하기 위해, 내가 보기에 가장 핵심적인 점만을 거론한다.

 

이 혼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만약 네덜란드의 현재 정치가 합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양보할 때, 예컨대 비례대표제와 같은 명시적인 제도적 장치가 그 원인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런 제도에 관해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그 사회의 문화적 역량 덕택인가? "문화"라는 용어가 너무나 포괄적으로 엉성하고 모호해서 설명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감안해야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을 성급하게 어떤 가시적인 법규의 결과로 결부시키는 환원주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식"을 (상식이란 영미식 "다수주의" 정치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구다) 말할 때마다 "누구의 상식"인지가 문제될 수 있듯이, "합의" 역시 "누구의 합의"인지가 항상 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의 결정이란 49%의 반대를 51%가 묵살할 때도 있고, 10%의 고집을 90%가 꺾지 못할 때도 있다. 말도 안 되는 고집쟁이 독선인데도 단지 대중이 무지하거나 겁을 집어먹은 탓에 90%의 지지율이 나타난다면 최 교수가 원하는 "합의"인가? 10%의 미만의 완강한 소수파가 다수를 설득하기보다 폭력을 행사하면서 협박을 감행할 때, 그런 자들과 어떤 내용과 방식의 "합의"가 가능할 것인가?

 

비례대표제나 온건한 다당제가 자체로 한국정치를 합의형으로 바꿀 수 있을까? 실험해볼 가치는 있지만, 오랜 (최소한 두어 세대)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어떤 방향으로도 결과를 판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온건한 다당제의 실험은 이미 1987년 이후 20여년에 걸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와 같은 한나라당의 일방 독주만을 보고, 비례대표제였다면 한나라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최 교수는 바로 다수주의가 아닌 합의주의의 가능성을 꿈꾸는 모양이지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통틀어 대한민국 국회에서 일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기간이 그런 기간에 비해 훨씬 길다. 그 동안에 어떤 합의가 이뤄졌는가?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합의"라는 의례를 거쳐서 통과한 법률만을 양적으로 계산한다면 이미 대한민국은 "합의형 정치"를 하고 있다. 물론 최 교수가 원하는 "합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만큼 중요한 쟁점에 관한 합의를 뜻할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중요한 쟁점들에 관해서 한국의 정치는 그렇다면 "다수주의적"이기는 한 것일까? 합의주의자들이 "다수주의적"이라고 폄하하는 영미식 의회에서 몸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현재의 고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합의" 때문에 군소정당의 순수파 의원(들)이 느끼는 좌절감 같은 것은 벨기에나 스위스에서는 생소하기만 한 일인가? 어차피 이 문제에 관해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더라도 내가 주장하는 대로 논의에 결론이 맺어질 수는 없을 테니, 추가적인 논의는 최 교수의 추가적인 반론 여부에 따라 대응하는 편이 현실적일 것 같다. 단,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내 책에서 이미 제시되었음은 밝히고 싶다.

 

"어떤 제도이든지 법령의 문구를 통해 '바람직한' 작동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것은 어떤 기계장치에 관해서든 제작자가 바람직한 작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정치적 장치이든 기계적 장치이든 바람직한 작동은 오직 실제 작동과정을 통해서 실현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 하든지로 갈리는 일이다. 기계의 바람직한 작동은 누가 어떻게 조종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있는 일이고, 정치제도의 바람직한 작동은 공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578쪽)

 

"합의제 민주주의"라고 명명된 나라에서는 갈등이나 강제나 억압이 없이 모든 일이 합의에 따라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리의 삼성"이라는 명칭에 나름 일리가 없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삼성의 관리 방식이 다른 모든 집단에게 모범적인 표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네덜란드에서 사회적 합의의 빈도가 예컨대 미국보다 높은지를 실제로 심각하게 따져 묻기로 하면 지표를 어떻게 설정하든지 아주 팽팽한 논쟁 상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미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여타 적어도 의회에서 쌈박질은 벌어지지 않는 많은 나라들을 한 편으로 묶고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선명한 대조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그 차이가 단순한 선거제도 때문은 아니고, 내가 "공론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요인과 더 관련이 깊은 것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은 애당초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될 수 없는 구호성 문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국면에서 모종의 개혁이 크게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거제 변경을 통한 의회 개혁은 바람직한 미래를 향해서 시도해 볼만한 아주 좋은 메뉴라는 점에서, 나는 "합의제 민주주의"니 "숙의(심의) 민주주의" 따위의 구호와 슬로건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것은, 가령 노회찬 대표가 선거연합에 동참하면서도 계속해서 민주당을 "지역당"이라고 폄하하는 말투를 사용한다고 가정할 때, 나는 그런 말투를 속으로는 마땅치 않게 생각하지만 선거연합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쫓아가서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인데, 이것과 같은 일이다.

 

구호라고 해서 공허할 필요는 없다. 나는 <프레시안> 연재에 포함된 (책에는 빠진) 의회개혁에 관한 장에서 비례대표제와 함께 결선투표제를 진보진영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선거제도 개혁의 결과가 얼마나 만족스러울지는 그야말로 해본 다음에나 판정할 수 있는 일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의회개혁을 향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고, 그처럼 높아진 관심의 결과 어떤 개혁안이 나온다면 물론 만족스러우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상태에 비해 더 나빠질 확률은 상당히 낮으리라고 본다.

 

이제 최 교수의 두 번째 질문, 보다 완곡한 주장이 담겨 있는 질문을 살펴보자 - "합의제 민주주의는 반드시 아니더라도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 대안이 빠져 있으니 얘기가 좀 싱겁지 않느냐?" 나는 원래 그 책에서 낡은 프레임의 비판에만 중점을 뒀다. 하지만 한국의 지성계에서 내가 한 말보다는 내가 안 한 말에 더 많은 시비가 붙을 것으로 미리 염려를 해서, 제6장에서 약간의 대안을 아주 개략적인 얼개의 형태로만 제시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불평은 내가 감수해야 할 항목인 것 같다.

 

의회개혁에 관한 논의가 책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보다 책이 너무 두꺼우면 독자들을 소외시킨다는 출판사의 염려를 묵살만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인데, 차라리 사법개혁에 관한 내용을 뺐더라면 최 교수에게 꾸지람을 좀 덜 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법개혁이 장기적인 의제로서 최우선 순위에 올라야 하고, 부분적인 수선이 아니라 재판제도와 법의식 전체를 발본적으로 전환해보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다.

 

이 이야기는 한 두 페이지를 더 써서 해명할 수는 없고 언제 따로 본격적으로 논의할 기회를 지금 탐색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생각하는 요지를 대략 책에서 피력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다시 한 번 정리해본다.

 

문명국가에서 정치적 결정이란 모두 재판과 방불한 과정과 절차를 통해 이뤄진다. 즉 해당 현안에 관해 사실적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사실의 조각들을 해석하고 정리해서 몇 개의 대안으로 압축한 다음, 목전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미래사회의 모습에 관한 전망들을 저울질해서 그 중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는 작업이다. 공허한 언표에만 매달리는 한국사회의 피상적인 정치의식은 그저 삼권분립이라는 위패를 사당에 모셔놓고, 만만한 놈 골라잡아 못살게 구는 구실로 악용하는 습성을 너무나 허망하게 용인하고 있지만,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향한 가치의 선택이라는 의미는 행정부나 의회나 법원을 막론하고 정부기관이 내리는 모든 결정에 가장 심중하게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핵심요소다.

 

사법부의 행태들을 비판하는 시야에 "중립성"이라는 허상이 끼어들면 안 되고, 정치와 도덕을 분리해야 하며, 또 정치를 세속적으로 절차주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내가 강조한 이유가 모두 여기로 수렴한다. 의회의 결정과정은 여간한 수준 이상의 이해력과 끈기를 동시에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성향에 따라, 또는 언론계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말투에 따라 확신이 없이 흔들리기가 쉽다. 의회에서 정해지는 정책들은 일반적인 만큼 추상적이고, 또 모두 미래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전문가라도 외부적인 고려가 없다면 사안 자체만을 가지고 한 쪽으로 확신을 가지기는 쉽지가 않다. 반면에 형사재판과정에서 누구의 말이 더 말이 되는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제3자라도 어느 정도의 판단이 가능하다.

 

만약 형사재판을 당사자주의에 따라 진행한다면 검찰과 경찰은 수사의 시작에서부터 용의자 쪽의 반론을 은폐나 무력으로써 무지르지 못하고 이치를 가지고 이겨내야 한다. 용의자와 수사기관 사이의 논쟁, 검찰과 변호인 사이의 논쟁은 보도를 통해서든 입소문을 통해서든 세상에 알려질 수밖에 없고, 시민들은 그런 사연들에 관해 나름대로 판단을 하면서 한국의 정치질서에 한편으로는 적응하고 한편으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가 상식에 너무나도 어긋나는 경우에는 자기도 그처럼 어이없는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동체적 자각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사실의 영역과 판단의 영역의 구분, 절차적 공정성에 관한 나름의 식견, 사법과 정치의 연관, 공공정책의 결정이 어떤 고려들을 거쳐야 하는지 등에 관해 나름의 의식을 형성하게 되고, 이는 곧 공론장을 구성하는 풍성한 원소가 되며, 나아가 다시 공론장의 토론에서 일방적인 전횡이 통할 수는 없고 항상 상대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들 것이다. 이처럼 나름의 근거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습관이 번져가면, 특정 언론사들이 짜 놓은 각본에 따라 꼭두각시 놀음을 자기도 모르는 채 벌이는 사람들의 수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현안 중 하나에 빗대서 생각해보자. 가령 한나라당의 친박계 의원들이 지금처럼 "당론"이 어쩌니 저쩌니를 가지고 소모성 기싸움을 벌일 것이 아니라, 행정도시 백지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분명하게 각인해주면 어떨까?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전횡을 부리고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어떤 묘수나 어거지를 쓰든 "당론" 뒤집기에만 성공한다면 설마 친박파가 국회에서 반대는 하지 못하리라는 관측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측의 여지는 노예와 같은 예속을 집단구성원의 미덕으로 여기고 대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바로 "배신"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습성이 한국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다수주의이든 합의주의이든 한국정치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전횡, 그리고 물리적 심리적 폭력과 억압에 굴종하는 것을 덕성으로 착각하는 왜곡된 사유의 습관이다.

 

내가 마녀사냥, 권력숭배, 교조주의, 집단생존의 프레임을 비판한 것은 그것들이 한국정치의 폭력성을 초래하는 문화적 요인으로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화적 진보는 토건주의로도 될 수 없는 일이지만, "창조적 소수" 따위가 앞에서 끌고 가는 방식이라면 토건주의 말고 어떤 다른 주의로도 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오래 걸릴 것이라고 한 말은 실제로 얼마나 오래 걸릴지를 계산해보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개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의미가 더 크다. 내가 원하는 방향의 문화적 변화가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아무리 빨라도 두 세대 정도의 시간, 즉 60년 이상이 필요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60년 정도"란 점쟁이 흉내가 아니라 발본적인 변화인 만큼 호흡을 길게 잡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내가 원하는 종류의 변화가 그보다 빨리 이뤄진다면 다만 환영할 일이지, "내 말대로 안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 따위로 저주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영향력을 위해 자극적인 구호만을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다) 양산하는 풍조가 계속된다면 진보운동은 모두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녹색성장" 따위 사기극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최태욱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취지에 공감해서, 이를테면 "합의제 민주주의"를 필요한 만큼 줄기차게 주장하더라도 그 구호성 의미에 자아를 지나치게 매몰시키지 않는 전략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모습만 볼 수 있어도, 문화적 진보의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희망을 가질 정도가 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내가 그 책에서 정책의 내용보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한 취지도 여기에 있다.

 

나는 요컨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의 결합"을 주장했는데, 절차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제도적 대안은 곧 사법개혁에 관한 구상으로 얼개는 말했다고 본다. 반면에 "사회적 자유주의"와 관련된 대안은 단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방향의 경제 정책이라는 식으로 어렴풋하게만 말한 것이 사실이다. 마침 <한겨레>(☞ "첼로를 켜는 노회찬")에 홍세화 씨가 "노 전 대통령이 깊은 회한처럼 술회한 '노동유연성 강화'에 관해 성찰하거나 발언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면서, 일전에 대연합을 촉구할 때 "민주당에 건 기대는 감성 과잉이 저지른 오류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후회한 대목이 있어 잠깐 곱씹어본다.

 

"노동유연성 강화"가 만약 개별적인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직업안정성을 부당하게 무시하는 구실로 악용된다면 그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각종 작업 현장에서 놀고먹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취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다니는 데 이동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의 유연성이라면 나는 유연성 강화가 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향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규직이라는 것이 단순한 작업조건을 넘어 특권과 신분을 의미한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을 귀족으로 만든다는 것은 신분과 특권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다. 귀족계급을 없애서 모든 시민을 비특권층으로 만드는 길, 다시 말해 기어이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모든 직업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물론 실제 상황은 결코 이와 같은 양자택일의 상황이 아니고, 특권은 아무리 없애도 계속해서 은밀한 곳에서 생겨난 다음 기회만 있다면 공공연한 곳에까지 뻗어나가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사회에서 평등사회로" 넘어가려는 기획은 경부고속도로나 새만금간척처럼 단방에 되는 일이 아니라, 두고두고 계속해서 그때그때 일이 불거질 때마다 감시하고 점검해야 하는 일이다. 그 과제를 맡길 시스템이 바로 사법 시스템인데 사법 시스템을 감시하고 점검할 임무는 결국 시민공동체의 몫이 되는 것이다.

 

현재 노동운동 조직들이 일면 교조적으로 경직되어 있으면서 다른 일면으로는 지도부가 공과 사를 혼동한다는 사실은 관계자들이 강하게 부인하면 할수록 더 뚜렷하게 반증될 뿐이다. 공적 자산인 주식회사를 개인소유물처럼 경영해서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이건희가 뻔뻔한 얼굴로 시민들에게 "정직"을 당부하는 기막힌 자본의 전횡 앞에서도, 진보운동이 힘을 별로 얻지 못하는 까닭은 노동계라고 해서 조직 내부의 구조나 지향하는 가치라는 것이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매력을 줄 수 있을까? "노동유연성 강화"든지 "노동유연성 강화 반대"든지, 그런 표어만으로는 안 된다.

 

전반적으로는 특권을 축소하고 개인의 역량을 존중하는 쪽으로 변화의 기조를 설정하되, 개별사안에서 특권을 얼마나 축소하고 개인의 역량을 얼마나 존중할지는 외부적인 정답이 따로 없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당사자로서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정을 하든 타협을 하든 죽기살기로 싸우든지 해서 결정이 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죽기살기로 싸우게 된다면 쌍방이 엮을 수 있는 모든 동맹을 다 끌어들일 테니까 범사회적 갈등이 상시화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실제로 다분히 그렇고, 다시 말하지만 무력 충돌을 대신하는 사법부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약해서 싸움에서 밀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일수록 결국은 동맹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것이고, 동맹과 연대를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고집을 상대화해서 전략적으로 사고할 필요를 배울 줄 알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문제에 관한 법률 차원의 해결책을 지금 나에게 묻는다면 방금 했듯이 신분의 장벽을 보이는 대로 없애고 개인의 역량을 키워준다는 일반적인 방향 이상은 얘기하기 어렵다. 어떻게 될지를 예상하라고 한다면, 좁게는 국회 내부, 넓게는 범사회적인 공론을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형식적인 말밖에 할 수 없다. 일반적 원칙과 개별적 적용이 자동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 옳은지는 개인이 혼자 정하면 그만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는 것이 인간과 논리와 정치의 엄중한 진실임을 진보를 꿈꾸는 자라면 무엇보다 먼저 인정하고 시작하라는 것이 그 책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핵심 취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평소에 그 순수한 열정을 흠모하는 홍세화 씨께는, <공산당선언>, <모순론>, <실천론> 등은 옛날에 비장한 마음으로 읽었던 추억 정도로만 남겨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처럼 지금 눈앞에서 실제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산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할 수 있을지에 신경을 더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모습이 최태욱 교수에게 조금이라도 전송되었기를 빈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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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미티아 센 저, 이상호, 이덕재 역, 『불평등의 재검토』(2008.5.10, 한울아카데미) imagefile 4978
23 이근식, 『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 (자유주의사상총서3)』(2006.7.28, 기파랑) imagefile 4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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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존 롤즈 저, 장동진 역,『정치적 자유주의』(1999.9.10, 동명사) imagefile 4895
16 존 롤즈 저, 황경식 역, 『정의론』(2003.3.3, 이학사) imagefile 5151
15 존 스튜어트 밀 저, 배영원 역,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1998.11.10. 범우사) imagefile 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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